[기로에 선 한국경제]⑧고사 위기 제약산업

입력 2011-10-06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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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개발·글로벌 시장 진출로 생존 길 찾아라

"요즘 제약업계요?, 마치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시한부 생명과 같죠"

한 상위 제약사 임원의 한숨 섞인 토로다. 정부의 약가인하 압박에 국내 제약업계가 깊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손실을 감내해야 하기에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위기감만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8월 12일은 제약사들에게 악몽과 같은 날이었다. 보건복지부가 내년 1월을 목표로 '사상최대' 의 약가인하 개편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개편안에 따르면 동일 성분 의약품에 대해 동일한 보험 상한가가 부여돼 특허만료 전 약값의 68~80%였던 상한가격은 53.5%로 낮아진다. 내년 상반기엔 특허만료시 대부분의 오리지널과 제네릭 약가가 50% 수준으로 일괄 인하되는 셈이다.

이같은 결정은 제약사들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정부가 계획한대로 약가인하가 강행된다면 당장 내년부터 매출과 이익도 그에 비례해 줄어들 것이 불보듯 뻔해서다.

◇ 구조조정 현실화…사업계획조차 못내놔= 국민건강을 책임지는 제약산업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정부의 약가 적정화 방안에 따른 보험약가의 지속적인 인하에 한-미·한-EU FTA 추진, GMP(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 선진화에 따른 제조비용의 증가 등 이중 삼중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약가인하 폭탄은 ‘상상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우선 규모만 2조1000억원에 달한다. 기존 보험등재의약품 약가인하 8900억 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3조원 상당의 약값이 일괄인하되는 셈이다.

국내 보험의약품 시장이 12조 8000억원임을 고려할 때 3조원의 인하 폭은 기업의 정상적 경영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충격인 것이다.

제약협회가 내놓은 손실 전망은 더 크다. 새롭게 시행되는 개편안 대로라면 연간 2조 2886억원의 경상이익 적자가 발생한다는 게 협회 측의 추산이다. 경상이익 적자를 내지 않기 위해 판매관리비에서 인건비를 50% 줄이고 광고홍보비와 연구개발비를 전혀 투자하지 않을 경우 절감되는 규모는 1조 3195억원에 달한다. 협회 관계자는 “판매관리비를 최대한 줄인다고 해도 지속적인 적자 발생이 불가피해 산업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KTB투자증권의 분석자료에 따르면 총 매출액 대비 약가인하 금액의 비율은 녹십자와 LG생명과학의 경우 1~2%, 유한양행과 한미약품, 동아제약의 경우 4~6%, 대웅제약, 종근당의 경우 6~9% 수준으로 추정된다. 또한 순수하게 약가인하 금액의 100%가 영업이익에 전가될 경우, 평균 50% 이상의 영업이익 감소가 불가피해 보인다는 분석이다.

이혜린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인건비 축소, R&D 비용과 판촉비 조절 등을 통해 판관비를 최대한 줄이더라도 최소 20% 이상의 영업이익은 감수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내년도 사업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제약사들이 늘고 있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사업계획 수립을 위해 당장 비용절감 방안을 내놓으라고 하는 데, 줄일 곳은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라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설령 사업계획을 세웠더라도 리베이트 비용을 선지출 한것이 아니냐는 괜한 의심을 받을 수 있어 쉬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 상황이다"라고 전했다.

◇약가인하,“다국적 제약사만 배불리는 꼴”= 인력 구조조정 공포감도 커지고 있다. 당장 살아남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탓이다. 상위권 제약사의 한 임원은 "당장 인력감축 계획은 없지만 경영악화가 현실화됨에 따라 임직원의 임금을 동결할 계획”이라며 "일부 중소제약사들 중에는 이미 구조조정에 들어간 곳도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고 전했다.

제약협회에 따르면 제약업계가 살아남기 위해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할 경우 2009년 기준 8만 1227명 종사자 중 1만 9494명이 악성실업자로 전락할 수 있다.

국내 제약시장이 다국적 제약사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리지널약과 제네릭 약값을 동시에 일괄 약가인하면 의사들은 안정성과 유효성이 입증된 오리지널 약을 처방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품질관리와 안전성 관리에 많은 투자를 하는 상위 제약사들은 제네릭약의 생산을 중단할 것이고, 결국 이는 국내 제약산업의 위축과 함께 다국적 제약사 배만 불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셈이다.

필수의약품의 공급 차질도 걱정이다. 필수의약품 생산비중이 높은 대한약품의 경우 지난해 매출원가 비율은 71%였다. 전체 제약업계 매출원가 비중(54%)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다. 매출원가는 줄일 수 없어 필수의약품을 많이 생산하는 업체는 더욱 직격탄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국내 제약산업이 살아남기 위한 돌파구는 없는 것일까. 우선 전문가들은 약값을 인하할 수밖에 없더라도 업계가 받아들이는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따라 제약업계는 현실적인 피해를 충분히 감안해 줄 것을 정부 측에 요구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달 말 제약협회는 임채민 보건복지부 장관과의 면담을 통해 약가제도 개편안 시행을 유예해달라는 입장을 복지부에 전달한 바 있다.

제약협회 관계자는 “기존의 약가 인하 정책(기등재 의약품 정비 사업)으로 이미 1조원을 절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로 2조원을 깎으라는 것은 제약업계에게 가혹한 조치”라며 “기존 정책이 마무리되는 2014년 이후 시장 변화 등을 충분히 살펴보고 검토해줄 것을 복지부에 요청한다”고 말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신약 연구·개발(R&D) △해외 시장 진출 △사업 다각화 등이 사면초가에 빠진 제약업계의 생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게 업계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여재천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상무는 "글로벌 혁신 신약 개발은 현재 제약업계 위기를 타개할 효과적인 생존전략"이라며 "R&D에 대한 인센티브 등 실질적인 지원책으로 신약개발을 독려해야 약가인하의 본래 목적인 건강보험재정의 건전성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도 “정책 규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해외 진출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며 "경쟁이 제한적인 희귀의약품과 고마진 바이오의약품 등 글로벌 시장 경쟁력을 갖춘 제품 뿐만 아니라 고도의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고부가가치 플랜트 수출을 통해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성장 기반을 구축해 나가는 생존전략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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