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우의 지금여기] 은행 돈 ‘눈먼 돈’ 오명 뒤집어 쓸 판

입력 2014-11-1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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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우 금융시장부 차장

“실적은 있는데, 누가 어디에 투자했는지 알 수 없다. 딱 눈먼 돈이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비슷한 내용의 중소기업 지원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 같은 은행들의 하소연이 늘고 있다. 최근 금융위의 기술금융 드라이브와 별개로 금감원도 관계형 금융이라는 이름으로 은행에 중소기업 지원책을 독려하고 나섰다. 재무제표처럼 겉으로 드러난 기준으로만 기업을 평가하지 말고, 기술력 등 정성적인 평가로 돈을 빌려주라는 취지다.

문제는 기술금융처럼 여건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실적만 강요하다 보면 혼란과 부작용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은행들이 고민하는 것은 기술금융과 관계형 금융이 상당 부분 겹친다는 점이다. 또 금융당국이 은행의 보수적 여신 관행을 개선하겠다며 위험 요소를 배제한 혁신성 평가가 부실을 부추기고 있다.

금감원은 관계형 금융 조기 정착을 위해 취급 실적을 은행 혁신성 평가지표 및 영업점 성과평가지표 등에 반영해 실적 우수은행과 영업점을 우대한다는 방침이다. 무엇보다 은행 직원이 가이드라인 등 관련 절차를 준수해 취급한 관계형 금융 대출이 부실화되더라도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했다. 금감원은 은행이 면책된 직원에게 승진, 성과급 등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지 현장검사 등을 통해 중점 점검한다는 계획이다.

기술금융 사정도 비슷하다. 최근 금융위는 은행권에 기술금융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KPI(핵심평가지표)상 기술금융 평가 항목을 추가토록 권고했다. 기술금융 부실화시 연체율 등 KPI에 불이익이 없도록 기술금융은 연체율 상정에 반영하지 않는 대상으로 분류했다. 이를 두고 은행 안팎에선 기대보다 우려가 높다. 기술금융을 지원한 실적은 있는데 어디에 투자한지 알 수 없게 ‘눈먼 돈’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반응이다.

은행권은 담보력, 기업의 신용상태보다 기술력, 미래성장력만 보고 대출을 하라는 것은 은행의 건전성을 도외시한 처사라고 말한다. 강제적으로 KPI 항목을 수정하고 이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다고 하면 무분별한 여신 확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부실을 떠안야 할 은행권의 걱정이 깊어지는 이유다.

은행들은 담보·보증 위주의 대출 관행에 익숙하다. 사실 대출 시장에선 3개 기술신용평가기관의 평가서만 믿고 신용대출을 해줄 은행은 없다고 한다. 이는 기존 담보대출보다 리스크가 큰 만큼 부실 발생시 은행의 건전성, 은행과 기술신용평가기관(TCB)의 책임 소재 문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하는 창조경제의 일환인 기술금융이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대출액이 급증해 적잖은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거품 등의 부실이 끼여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금융당국이 기술금융 실적을 강요하자 기존 거래기업에 기술금융의 껍데기만 씌워 화답하는 모양새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관계형 금융 역시 은행 입장에선 지나친 간섭이다. 금융 본연의 기능은 축적된 자본을 효율적으로 중개하는 역할이다. 배급하듯 돈을 뿌리는 것이 아니다.

금융은 비올 때 우산 뺏기식 대출 행태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비 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고, 비 그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다. 이것이 중소기업 지원책과 어울리는 내실있는 금융정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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