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정치인들 돌려보내는 게 촛불문화의 완성”

입력 2016-11-25 10:56 수정 2017-02-0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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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지식인 집단의 자만이 지금의 분노 유발한 것”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현 시국을 초래한 원인으로 지식인들의 자만과 오만을 꼽으며 “과거에서 지금을 보지 말고, 미래에서 지금을 보는 혜안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현 시국을 초래한 원인으로 지식인들의 자만과 오만을 꼽으며 “과거에서 지금을 보지 말고, 미래에서 지금을 보는 혜안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세계 경기는 더욱 불확실해졌다. 수출은 줄고, 내수마저 둔화되는 시기에 매주 토요일이면 광화문에 촛불의 함성이 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가 혼돈의 도가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을 피의자 신분으로까지 만든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도 다른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개탄해 마지않는 심정을 드러냈다.

“내일의 꿈을 찾는 데 노력해야 할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연단에 서서 구호를 외쳐야 하는 현실이 참담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어른 모두의 잘못입니다. 소통을 외면하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저 혼자만 잘났다고 여기는 불통이 현재의 분노를 유발했다고 봅니다.”

지난 21일 이투데이가 만난 정 명예교수는 우리 사회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임에도, 현재 혼란한 정국을 초래한 원인으로 지식인 집단의 ‘자만’을 지적했다. 그는 “이젠 지식인이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지식인의 의무’라는 개념 자체에 회의감을 내비치며 말문을 열었다.

“소위 지식인으로 자처하면서 자만으로 가득 차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 자체가 이 사회의 부조리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런 허상의 ‘인텔리 문화’가 정치는 물론 법조계·교육계에 가득합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누구든지 지식인이 되는 세상인데, 이제는 ‘잘났다’는 오만에서 벗어나 ‘각자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는 소위 ‘인텔리’라고 부르는 학자답지 않게 자기 자신을 한껏 낮추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자신의 분야 외에는 잘 모른다며 본인을 ‘부족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감히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고 미래를 맡기자고 말하는 사람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을 맞는 이 노(老)학자에게서 그대로 드러났다.

현 시국에서 드러난 사회적 부조리를 어떻게 보는지, 이 시점에서의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정 명예교수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최근 100만이라는 인파가 모인 ‘촛불집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번 사태에서 보이는 민중의 성숙한 정치 의견 표출은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곳에 정치인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우려스럽다. 지금 여야가 전부 국회의사당을 비우고 길거리에 나와 있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라는 게 뭔가. 우리의 의사를 국회의원들이 위임받아 의사당에서 표현하는 제도다. 우리를 대신해 의회에서 토론을 해 달라는 것이지, 그것을 길거리에서 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이 자꾸 집회에 등장한다는 것은 사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우리 ‘촛불문화’가 굉장히 성숙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마지막으로 완성되기 위해선 정치인이 집회에 왔을 때 ‘우리와 함께 있지 말고, 돌아가서 당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해 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혼란한 상황 속에서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우선 나는 지성인·엘리트 등과 대중·민중을 나누어 세상을 설명하겠다는 인식 자체가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거의 이론이다. 선민의식에서 비롯한 엘리트의식, 곧 엘리트가 대중을 끌고 나가야 한다는 이론은 계급 갈등이 심하던 전근대와 근대의 과도기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진 문제의 인식이고, 해답을 위한 대안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시대다. 폭주하는 지식, 그 지식의 보편적인 확산 등으로 모두가 지식에 접근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다. 지금의 지식은 절대로 특정 계급만의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시대는 각자의 분야를 잘 아는 전문가 모두가 지식인인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종교학을 하는 사람이라, 다른 분야는 잘 모른다. 정치가도 정치 말고는 잘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TV프로그램을 보면 각 분야에서 대단한 능력을 쌓은 달인들이 나온다. 이분들도 사실은 각자의 노하우가 있고, 나름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구축한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기능이 고도로 발전된 단순노동자라고 판단한다면 이보다 더 큰 착각은 없다.

이런 시대에는 ‘지식인인 내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너와 내가 모자라는 것을 서로 채운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잘난 사람들의 세상’이 아니라 ‘모자란 사람들의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더불어 사는 것이다. 내가 지식인이라고 해서 대중을 이끈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표현만 다를 뿐 ‘개, 돼지’를 운운하던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결론을 내자면 대중이라는 개념을 지성인을 뺀 나머지 ‘비지성적인 집단’으로 볼 게 아니라, ‘무수한 지성인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단’이라고 봐야 옳다고 생각한다.”

‘행동하는 양심’이란 비현실적인 이론

△학계라는 공간에는 우리가 소위 ‘지식인’이라고 일컫는 학자들이 있다. 역할까지는 아닐지라도 이들이 이번 시국에서 정치현실에 가져야 할 태도 같은 것은 없겠는가.

“우리 사회에 흔히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말이 있다. 감동적인 슬로건이긴 하지만 사실 현실성이 그다지 없다. ‘이끄는 엘리트’라는 고전적인 개념에서 나왔다는 문제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지식인이 연구해야 할 객체를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말이라는 점이다. 학문은 언제나 연구 대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학자가 정치현실에 뛰어들어 직접 참여하기 시작하면, 그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우리네 정치현실은 이런 모습이더라’라고 지적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얘기다. 학자들이 정치현실에 자꾸 참여할수록 사회의 자기성찰 능력은 사라지는 것이다.

맹자의 사례를 들어보자. 맹자는 정치현실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정치현실이 받아주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국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학자 입장에 머물러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때 정치현실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맹자가 위정자들과 문답을 주고받으며, 시대정신에 대해 내린 진단은 당대에도, 그리고 후세까지도 널리 퍼져 정치현실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맹자의 모습이 학자들에게 귀감이 돼야 한다. 현학적인 체도 하지 않았고, 세력을 만들어 힘을 쌓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폭 넓고 깊은 앎에서 우러나는 판단을 담담히 발언하니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다. 이렇듯 학자,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깃발과 현수막을 들고 길거리에 나가야만 양심인 것이 아니다. 학자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어떤 형태로든 드러낼 자유는 있지만….”

△현 시국을 풀어가는 해답으로 제시할 만한 키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

“유교의 가르침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이 있고, 불교에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말이 있다. 이번 사태는 대통령과 국민이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실패한 데 문제가 있었다. 유교식으로 말하면 ‘나를 넘어서서 예(禮)로, 곧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극기복례에 실패한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나’라는 개인을 넘어 국민에게 다가가는 것이 그 자리의 ‘예’다.

이번 사태는 대통령이 ‘나’를 넘지 못하고, ‘나’에게로 빠져들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파사현정은 ‘잘못된 것을 혁파하고 바른 것을 드러내라’는 뜻이다. 혼란이 지속될까 걱정돼서, 못 물러나겠다는 말은 교활한 이야기다. 이를 혁파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파사’와 ‘현정’이 자동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삿된 것을 혁파’하는 데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바른 것을 드러내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용기 있게 지금의 비정상을 깨트린다 할지라도 새로이 정상적인 사회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사회 구축을 위해서는 용기보다 지혜가 나서야 한다. 과거에서 지금을 보지 말고, 미래에서 지금을 보는 혜안이 필요한 때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의 한 부분으로 이화여대의 비리가 드러나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대에도 몸담은 적이 있었던 입장에서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우리 사회에서 부패 사건이 벌어지면 어쩌다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체적인 구조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구조, 또는 무감각해진 관행, 아니면 풍토의 문제라고 본다. 비단 정유라 씨 입학에만 그런 비리가 있었던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청문회를 생각해 보라. 인사청문회 때마다 매번 논문 표절 시비가 문제되고 있지 않나. 물론 표절한 사람도 잘못이지만, 그 논문을 통과시킨 지도교수나 심사위원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런데 그것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논문 표절이 청문회 때마다 문제가 된다는 건 발표된 논문, 발급된 학위 전체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번 이대 특례입학 비리문제는 학계라는 구조 전체가 비정상적임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후이다. 차제에 학교의 미래상을 조망하면서 오늘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재구축해야 할 것이다.”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2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를 지낸 한국 종교학계의 거두다. 은퇴 후 한림대 특임교수, 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한국종교학회 회장,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으면서 오로지 종교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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