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이런 ‘스튜핏’한 세상

입력 2017-09-26 10:48 수정 2017-09-27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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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온라인뉴스부장

“돈은 안 쓰는 것이다.”

세상에나, 이렇게 명쾌한 단언이 있을 수가. 돈에 대한 무수한 명언 중 가히 톱 반열에 올려놓을 만하다.

이 반전 매력 넘치는 말을 내뱉은 이는 리포터 김생민이다. 연예인 경력 25년 차인 그는 요즘 전에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김생민의 영수증’이란 프로그램을 통해서이다. 원래 팟캐스트에서 시작했는데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공중파까지 진입했다.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형식도 신선하다. 타인의 영수증을 근거로 소비 습관을 충고한다. 고쳐야 할 점은 “스튜핏(stupid)”, 잘한 일은 “그뤠잇(great)”이라고 외친다.

‘영수증 지적질’은 김생민이니까 가능한 거다. ‘통장요정’이라는 별명처럼 그는 알뜰하다. 그 자신이 절약하는 생활의 본보기이다. 성실하고 반듯한 이미지에 해박한 재테크 지식(2008년 재테크 책을 내기도 했다)까지 갖춰 재무 상담사 역할을 해낸다.

인터넷엔 그의 어록들이 돌아다닌다. 개그맨 출신답게 장난기 넘치는 말들이지만, ‘짠돌이’로 살아온 경험담이 그대로 녹아든 직설이다. ‘옷은 한 번 사면 17년간 입는 것’, ‘껌은 친구가 사줄 때 씹는 것’, ‘커피를 마시기 전에 커피란 나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라’라는 식이다.

김생민의 인기에 어떤 이들은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서 절약이 미덕이 되는 가치로 전환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얘기한다. 혹은 이제껏 남들 눈치 보며 이 정도는 쓰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과시적인 소비 행태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럴 법한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기자는 의미의 ‘욜로(YOLO·You Only Live Once)’나 돈 쓰는 재미를 추구하는 ‘탕진잼’이 유행처럼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소비 트렌드의 건전한 변화? 착각이다. 소비 습관에 대한 작용, 반작용으로 해석하는 것도 ‘오버’이다. 화제가 되는 유행어들이지만 근본적인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그 흐름이란 ‘욜로(쓰고 보자)’나 ‘스튜핏(쓰지 말자)’이나 같은 근원에서 시작한다는 데 있다. 먹고사는 일에 닥쳐올지 모를 불안이 그것이다.

‘어차피 나아지지 않을 삶, 지금 좀 쓴다고 대수인가’ 혹은 ‘이런 데라도 쓰는 재미로 사는 거지’가 욜로와 탕진잼에 숨어 있는 불안이라면, 근검절약이라는 미덕을 강조하는 김생민 신드롬의 이면에도 불안이 숨어 있다.

최근 한 여론조사 기관이 조사한 김생민의 어록 중 가장 공감 가는 말을 보면 그렇다. 13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는 ‘지금 저축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였다. 이는 나중에 어떤 경제적인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잠재된 불안이다.

언제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의 그림자가 우리 사회에 드리워져 있다. 이 불안은 실업자들이나 구직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직장인들은 언제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의 대상이 될지 몰라 불안하다. 자영업자들은 엄청난 빚더미에 짓눌려 걱정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청년, 은퇴 후를 걱정하는 장년, 돈벌이를 멈출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노년 모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노력하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보다는 언제라도 지금보다 더 열악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전 세대에 번져 있다. 이 불안감을 타고 마케팅화된 욜로는 한탕주의로 치닫고, 근검절약이라는 상식적인 가치는 곤궁함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 되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북한의 위협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지금, 다행인지 불행인지 외부의 위협에는 무심하리만치 강한 내성을 자랑하지만 개개인의 내부에서 비롯된 이런 경제적인 불안은 웬만해선 면역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면역 체계는 언제쯤 갖춰지는 것일까. 허리띠 졸라매는 현실도 미래가 있어야 행복이다.

이런 ‘스튜핏’한 세상을 바꿔 나갈 변화는 언제쯤 감지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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