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말] 동계올림픽 聖火 뒤의 ‘숨은 숙제’

입력 2018-02-1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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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정부 일을 하는 동안 국제행사 하나를 유치하기 위해 유치단장 자격으로 동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한 적이 있다. 투표권을 가진 이들 국가의 대통령이나 총리를 만나 우리를 지지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여야 국회의원까지 포함된 작지 않은 규모의 유치단이었는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대기업 회장 한 분이 일정 부분 이 유치단과 동행하게 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를 기획한 직원이 말했다. 가 보면 그 이유를 안다고.

정말 그랬다. 첫 방문 국가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 나라 총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이 대기업 회장만을 모시는 것 같았다. 국제행사 건도 유치단장의 이야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이야기해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국가도, 또 그다음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예정된 일정이 끝날 무렵 누군가가 인접 국가 한 곳을 더 방문하자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 나라 최고 지도자를 만나는 일은 하루 이틀 만에 성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그 회장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좀 알아봐도 되겠느냐고.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로부터 전갈이 왔다. 모레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고.

한편으로 뿌듯했다. 우리 기업들이 이 정도로 성장했구나.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없이 유치단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깊어졌다. 일이 잘 풀려 좋기는 한데, 이들 기업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행사 유치가 그 기업에 도움이 되어서? 글쎄,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지지를 부탁하는 과정에서 상대 국가와 그 관련 인사들에게 여러 가지 부담되는 약속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뭘까? 그냥 애국심에서? 이것 또한 글쎄,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러면 뭘까? 금융 지원이나 인·허가 등 정부로부터 무슨 특권이나 특혜를 받기 위해서? 예전에야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청와대 행정관이 기업에 전화 한 통만 해도 정경유착이다 뭐다 하며 ‘게이트’로 번지는 세상이다. 그런 걸 기대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두려움! 바로 그것 같았다. 툭하면 횡령과 배임 등 걸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넓게 적용되는 그런 죄, 그리고 그런 죄 위에 서슬 퍼런 칼을 휘두르는 국가, 바로 이런 것이 이들로 하여금 국가권력의 눈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보험’으로 이런 일에도 앞장을 서는 것이고.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바로 이 두려움에 올라타 이들을 앞세우고 있는 것 아닌가. 국가가, 또 국가 권한을 행사하는 정부 인사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또 다른 나라로 향하는 일행과 떨어져 귀국 길에 올랐다. 순방 결과는 좋았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때의 그 기분 때문일까? 전혀 다르고 훨씬 더 큰 행사인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며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우리 모두 다 안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삼성이 어떤 일을 했는지, 또 다른 기업들이 어떤 기여들을 했는지. 이들이 무엇 때문에 그리했을까? 국가권력이 무서워 ‘보험’ 들 듯한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과거와 달리 이제 이 보험은 제대로 된 보험이 아니다. 반드시 지불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 하루 전, 검찰이 ‘다스’ 문제와 관련하여 삼성전자를 압수수색했다. 동계올림픽 유치의 일등공신을 말이다.

이제 기업들도 안다. 이 보험이 불량보험인지를.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 국가권력의 칼이 선별적으로, 아니면 비합리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성에 대한 압수수색을 보고도 보험에 들 이유가 없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보험에 들어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찌해야 이 비정상적인 구조를 고칠 수 있을까? 동계올림픽 성화 뒤에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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