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농촌의 낭만에 대하여

입력 2018-10-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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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주말이면 서둘러 기차를 타고 농장으로 내려가는 내게 사람들이 묻곤 한다. 농촌생활의 낭만이 뭐냐고. 누군가는 고추, 상추, 가지 등 푸성귀 심고 가꾸는 주말농장의 아기자기한 재미를 상상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 농장에서 여유롭게 전지하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겠지만, 일단 농사는 고되고 힘든 노동의 연속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비오듯 흐르던 올여름엔, 하루가 멀다 하고 바짝 말라가는 금송에 물 주고 무섭게 올라온 잡초에 풀약 치느라 평생 흘린 땀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린 듯하다. 폭염 무서운 줄 모르고 한낮에 일하다가 더위를 먹는 바람에 며칠 고생도 했고, 사람 키보다 훌쩍 커버린 잡초를 손으로 뽑다가 풀독이 올라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러니 농촌생활의 낭만과 여유를 단박에 말하는 건 영 쉽지 않다.

그래도 가끔은 뜻밖의 낭만과 마주할 때가 있다. 지난주엔 (조금 과장해서) 작은 계란만 한 크기의 대왕대추를 땄는데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심은 열 그루 중에 세 그루만 살아남았으니 농사 점수는 완전히 낙제임이 분명한데, 가지치기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꽃 필 때 약 한번 제대로 쳐 주지 못했건만 올해도 주렁주렁 열매가 달렸으니 그저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견함도 잠시, 완전 무(無)농약 유기농의 경우 실망을 넘어 우리를 절망시킬 때가 많다. 이번에도 때깔 곱고 잘생긴 대왕대추를 골라 한 입 베어 물으니 웬걸 벌레가 먼저 들어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벌레의 습격을 피해 건강하게 익은 대추를 아삭 물었을 때의 기쁨은 탱탱한 식감에 기품 있는 향기를 넘어 황홀하기까지 했으니, 이만하면 낭만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듯.

3년 전쯤 땅을 비옥하게 해보자고 콩(서리태)을 심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당시에도 난생처음 해보는 콩 농사라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몰라, 순도 제때 따주지 못하고 잡초 관리도 거의 손을 놓는 바람에 풀 반 콩 반의 밭을 보면서 울상을 짓곤 했다. 덕분에 콩깍지마다 세 알의 콩이 가지런히 들어 있어야 했건만 우리 밭엔 기껏해야 두 알만 들어앉았고, 한 알만 있거나 빈 쭉정이도 많이 나왔다. 실망을 뒤로하고 정성을 다해 골라낸 콩을 넣어 밥을 지었는데, 맛이 어찌나 훌륭하던지 반찬도 없이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친지들에게 조금씩 나눠 드렸더니 “옛날 서리태 맛이 바로 이랬노라”며 아무리 비싸도 사서 먹을 테니 팔라는 분들 등쌀에 시달리면서도 뿌듯한 미소를 지었으니, 이 또한 낭만적 추억임이 분명한 듯.

“가는 곳마다 받아 온 복숭아가 한가득”이라며 우리 농장 앞에 복숭아를 나눠 주고 가는 단골 택배 기사의 따스한 마음, “올해 무가 유달리 달다”라고 하시며 비닐하우스에 한 다발 던져주고 가시는 홀로 된 할아버님의 넉넉한 손길, “베트남 여주가 주렁주렁 달렸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라고 건네주는 베트남 며느리의 살가운 눈길처럼 수확의 기쁨을 나눌 때도 농촌의 낭만을 만끽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동네 어귀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할머니들끼리 노닥거리며 나누는 이야기 속에도 은근한 낭만이 깃들어 있다. 젊은 시절 당신 남편들 바람피운 이야기를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와중에 자식들 별탈 없이 키워낸 무용담(?)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열쇠 기술자였던 서방은 시장통 미장원 주인 여자와 눈이 맞았었고, 면 서기였던 남편은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바람을 피웠다는데. 젊었을 때 그리 당당하던 남편들이 이젠 마누라 구박 참아내며 꼬리 내린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짠하다는 할머님들 표정에서 미움 대신 연민(憐憫)이 듬뿍 묻어나오는 걸 보니 낭만이 따로 없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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