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젊거나 늙었거나 인생은 어렵다

입력 2018-10-0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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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가을로 접어들자 숲은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쉼없이 울던 매미 소리가 뚝 그치고 거대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숲속 길에는 가끔 도토리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그 침묵에 균열을 낸다. 지난여름의 폭염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끔찍했는데, 어느덧 그 기억도 아련하다. 가을날 오후의 빛이 드리워지며 도처에 생기는 잔영(殘影)은 애틋하다. 땅거미 지고 바람에 숲이 일렁인다. 마을의 개들은 바람소리가 인기척인가 하여 공허하게 컹컹 짖는다. 추분이 지난 뒤 밤은 빨리 찾아온다. 그 시각 내 영혼에는 초조함과 불안이 깃든다. 그것은 밤을 두려워하던 선조에게서 받은 선험 기억의 흔적일 테다.

나도 한때는 젊었었다. 숲은 울창하고 빛으로 넘치던 여름은 당연히 젊음의 은유로 적당하다. 혼란과 열정이 뒤섞인 채로 맞은 젊음의 시기에 나는 자기 조절 능력이 부족한 탓에 자주 미숙과 불안정성, 시행착오의 함정에 빠지곤 했다. 세상의 질서에 반항하고, 불가능한 꿈을 꾸었다. 그 시절, 나는 무능력했고, 외톨이로 외로웠다. 그것은 내가 문학에 투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20대 시절을 시립도서관에서 책이나 읽고 습작을 하며 보내며,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좋아하는 것에 열광하고 들뜬 채 보내는 것은 젊은 감정의 특징이다.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나는 늘 혼자여도 좋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문학은 나를 압사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내 연약한 내면은 문학으로 말미암아 더 단단해졌다. 이를테면 가난을 견디는 내구력 같은 게 생겨났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철학자 니체의 경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청춘, 그 ‘가장행렬’은 빨리 지나간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늙고 지친 내 모습에 놀란다. 가을로 접어들면 사방에 넘치던 빛은 줄고 숲의 활엽수들은 조락을 시작한다. 장년기는 ‘뺄셈의 계절’, 가을에 견줄 수 있으리라. 젊음을 감싸던 빛은 덧없이 시들고 사라진다. 대신 나이와 경륜을 쌓고 맞은 장년기엔 인생의 혼란은 가라앉고 체념과 원숙함으로 빚은 내면이 제법 확고해진다. 나이가 들고 보니, 알겠다. 나이든 자에겐 젊음이 갖지 못한 몇 가닥의 지혜와 한 스푼의 원숙, 그리고 고유한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이가 들며 늙는 일은 당혹스럽다. 늙는 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 겪는 낯선 사태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들끓던 그 많은 갈망은 마르고 동경은 시들었다. 풍성한 여름도 곧 지나가고 천지간에 가을이 닥친다는 것과, 인생의 시간이 덧없음으로 짜여진다는 사실쯤은 경험으로 충분히 안다. 빛나고 아름다운 나이를 지나 처음 맞는 노년도 의미가 없지는 않다. 봄과 여름은 꽃과 신록으로 빛나지만 가을의 단풍과 열매들도 충분히 아름답듯이. 젊음도 노년도 다 인생의 한 과정이다. 미숙과 만용과 실수로 얼룩진 저 젊은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지금의 내가 좋다.

진작 개봉 소식을 듣고 설레며 기다리던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았다. 이언 매큐언의 원작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체실 비치에서’다. 이 영화의 배경은 존 에프 케네디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있던 1960년대다. 그 시절 역사학도인 에드워드와 바이올린 연주자인 플로렌스는 첫 만남에서 사랑에 빠진다. 마침내 이 청춘남녀는 결혼식을 올리고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온다. 긴 해안 일대가 매끄러운 돌로 덮인 바닷가 신혼 여행지에서 둘은 작은 오해와 갈등 속에서 파국을 맞는다. 이 영화는 시종 잔잔하지만 체실 비치의 수려한 풍광과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의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선율이 넘실대고 사랑의 서사와 하나로 녹아들며 관객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인생의 아이러니와 엇갈리는 사랑의 비극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는 반전(反轉)이 숨어 있다. 남자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그리하여 신혼여행지에서 자기가 부당하게 배척당했다고 오해하며 잔뜩 화가 난 남자는 여자에게 ‘돌덩어리’이고 구제받을 길 없는 ‘불감증환자’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둘은 등을 돌리고 각자의 길을 걷는다. 세월이 흘러,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다. 귀밑머리가 희끗해진 남자는 그 여자가 이끄는 실내악단의 고별 연주회 공연을 지켜보며 섬광처럼 짧게 스쳐간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뼛속까지 파고드는 회한으로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극장을 나서며 영화의 아름다운 잔상을 품은 채 ‘젊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아침의 날빛이 밤의 어둠을 무찌르고 솟구쳐 나오듯이 무모한 열정과 모순의 혼재를 꿰뚫으며 나오는 승리를 꿈꾸지만 젊음은 그 내부의 방향 상실과 불확실성으로 마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의 젊은이에게 결혼식은 미숙한 젊음에서 벗어나 성인기로 이행하는 일종의 입문 의례라고 할 수 있겠다. 젊음은 오랫동안 ‘미숙’의 표지였다. 그 표지를 떼어내고 ‘성인’으로 인증해 주는 절차가 바로 ‘성인식’이다.

아마도 결혼식은 ‘깃털 없는 두발 동물’에게 남은 젊음과 성인 세계 사이에 걸쳐진 성인 입문의 희미한 흔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성인식의 문턱에서 미끄러진다. 이들이 어른의 세계로 입문하는 절차에서 실패한 책임이 딱히 어느 한쪽에만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관능적인 욕망에 대한 남자의 서투름과 여자의 과도한 두려움이 겹쳐져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수석 졸업으로 학위를 취득했지만 성인식 입문 의례에서 미끄러지며 변방을 겉돈다. 그가 체실 비치에서 홀로 서서 바라보는 일렁이는 바다는 그가 치러내야 할 길(방향) 없는 세계의 아득함과, 자기 자신에게서 뿌리 뽑힌 채 떠도는 방황의 고단함을 상징하고 암시한다. 그가 겪은 어처구니없는 실패와 방향 상실로 빚어진 인생의 참담함은 청춘의 시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인가를 보여준다.

젊음이 인생의 가장 좋은 때라는 생각과 젊음이 인생의 가장 끔찍한 때라는 상반된 생각이 공존한다. 앞서의 것은 젊음이 인생의 창창한 가능성과 희망을 품은 까닭이고, 뒤의 것은 젊음이 실수와 시행착오를 품고 있기 때문일 테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젊음에 열광하고, 젊은이들이 과거에 견줘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이 막상 제 벌이를 하며 어른이 되고자 할 때 사회적인 기회의 문은 협소하고 자립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전통사회에서 치르던 성인식 없이 누구나 어른이 된다. 젊은이들은 성인 입문 의례의 폐기로 인해 두 가지 함정에 빠진다. 첫째는 자신의 사춘기를 생물학적 필요 이상으로 길게 늘리는 것과 둘째는 ‘어른의 유소년화’라는 인지 부조화의 시기를 연장한다는 점이다. 일자리가 없는 취업 절벽사회에서 젊음은 일종의 장애이고 넘어서야 할 벽이다. 이들은 성인 세계로 들어서는 취업과 결혼이라는 진입 장벽 앞에서 덩치만 커진 ‘어른의 유소년화’에 머물며 무자비한 경쟁 세계에 방치된 채 방황을 겪는다. 젊은이들이 제 몸에 문신이나 보디 피어싱 따위로 어른임을 과시하지만 이들은 성숙에 이르지 못하는 ‘도착된 아들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쨌건 젊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참된 방식으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경험과 견문이 얕은 젊은이가 인생의 심오한 이치를 깨닫고 매사 지혜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나이가 들어 비로소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점과, 세상이 내 의지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 인생이란 풀어야 할 수수께끼와 같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살 수 있다면 더 근사한 삶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은 어리석음과 실패를 되풀이하고 말 것이다. “인생은 뒤돌아볼 때 비로소 이해되지만, 우리는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라고 말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옳다. 왜 아니겠는가! 젊었을 때 최선인 줄 알았지만 지나고 나니 그게 얼마나 큰 위험이 잠재된 결정이었는지를 깨닫고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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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이후 시인 겸 인문학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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