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의 원견명찰(遠見明察)] 약속의 진보

입력 2018-11-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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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前 지식경제부 차관

어느 날 다섯 살이 된 외손녀가 예쁘게 입을 내놓고 불평을 털어놓는다. “아무개는 이상해. 얼음 땡 놀이를 할 때 얼음을 외치면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자기는 얼음을 깨는 신무기가 있으니 움직일 수 있다면서 움직여. 움직이지 않기로 한 약속인데….”

손녀의 불평 대상인 그 친구는 약속을 파기한 것인가? 아니면 창조적 파괴를 한 것인가? 창조적 파괴는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적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비판적 생각이 역사의 발전을 견인한다. 그러나 기존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대세가 되면 역사는 무너진다. 불확실하게 먼 미래에 오는 역사의 진보를 만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현재의 평화로운 삶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또한 필요하다. 약속을 지키는 힘이 보수라면 약속을 발전시키는 힘은 진보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답은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정답을 찾아내려면 상대방에 대한 배제보다는 포용과 관용이 필요하다.

지난해 6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6대 에너지 정책 중의 하나가 미국의 셰일가스를 한국에 수출하는 것이었다. 셰일가스는 진흙이 수평으로 퇴적하여 굳어진 암석층에 함유된 천연가스이다. 100년도 더 전에 그 존재가 밝혀졌으나, 추출할 수 있는 기술 부족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서야 수압파쇄 공법(hydraulic fracturing)이 개발되어 상용화에 성공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매장량만 해도 전 세계가 60년간 사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셰일가스 개발의 성공은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중동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그린 뉴딜 정책’도 셰일가스를 활용한 국내 에너지 공급 안정성이라는 자신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하였고, 미국이 기후변화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015년 파리에서 합의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셰일가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이 에너지 독립(Energy Independence)을 넘어서서 에너지 우위(Energy Dominance)를 이루겠다고 선언하였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셰일가스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수출하고 이것을 미국의 외교정책과 연계시킨다는 구상이다.

셰일가스는 비록 생산과정에서도 온실가스가 유출된다는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연소 시에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은 대략 석탄의 50%, 석유의 70%에 불과하여 청정에너지라고 평가된다. 세계 최대의 생산국인 미국은 이제 에너지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하였고 이를 무기 삼아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도 이러한 미국의 에너지 정책과 외교 정책의 전환에 상응하는 새로운 정책의 틀을 짜야 할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셰일가스는 기존의 천연가스와는 거래 조건이 다르다. 우선 가격이 유가와 연동되어 있지 않고 가스 시장 원리로 결정된다. 또한, 확보가 최우선이던 시절의 거래 조건인 15년 이상의 장기 계약 관행도 줄어들었고, 인수 여부에 상관없이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의무인수(take-or-pay) 조항도 없이 구매할 수가 있다.

이러한 유연한 거래 조건이 구매자에게 무조건 유리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가스 시장이 판매자 우위에서 구매자 우위의 시장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전문가가 이견이 없다. 일본,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입국인 우리로서는 새로운 도전이며 좋은 기회이다.

셰일가스라는 새롭게 부상하는 에너지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은 에너지 전환이라는 창조적 파괴의 든든한 뒷받침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에너지 정책의 목표인 에너지의 안정적, 경제적, 친환경적 공급이라는 보편적 약속을 지킬 수도 있다. 약속을 지키며 그것을 진보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공동체의 상호 이해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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