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첫눈 오던 날

입력 2018-11-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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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올겨울 첫눈이 내렸던 지난 토요일, 제자들이 보낸 서너 통의 카톡 문자가 떴다. “교수님의 ‘첫눈 오면 휴강~’ 말씀이 문득 생각나서요”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KT 아현지국 화재로 인해 주말 내내 불통이었던 인터넷을 월요일 출근길에 열어보니 그곳에도 두어 통의 반가운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역시 “첫눈이 오면 교수님이 떠오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대학 시절, 바람이 좋은 날이면 마음이 잡히지 않아, 하늘이 맑으면 마음도 부풀어 올라, 비가 내리면 마음까지 축축해져서, 정문 지나 대강당 앞 계단을 오르려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나가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를 몹시도 부러워했던 나는 대학원에 진학한 후부터 소소한 일탈을 주도하며 은밀한 기쁨을 만끽하는 악동(?)이 되었다. 중간고사 기간이면 동기들과 선후배들 꼬여서 대학원 수업 모조리 휴강시키고 설악산을 다녀왔고, 눈이 오는 날은 야외수업이 적격이라며 친구들 부추겨 경복궁 ‘다원’(예전 커피집 이름)으로 끌고 가 밤늦도록 노닥거리기도 했다. 그랬던 젊은 시절의 치기(稚氣)가 그리워, 첫눈 오면 휴강을 외쳤던 것 같다.

첫눈 왔다고 메일을 보낸 제자 중 한 녀석은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지금은 마흔을 바라보는 제자가 이십대 중반이던 시절, 교정에서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 있던 그녀와 우연히 마주쳤다. 출산 예정일이 3주 정도 남았는데 대학원 기말 페이퍼 제출하러 나왔다는 것이다. 건강한 아기 출산하라고 덕담한 후 헤어지려는데 불쑥 “선생님께서 저 중매 서신 것 아시나요?” 하는 것이 아닌가.

제자는 3학년 때 내가 가르치던 ‘가족 사회학’ 강의를 수강했는데, 당시 과제가 ‘남자친구’와 함께 가족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보고 영화평을 쓰라는 것이었다 한다. 같은 영화를 보는 시선이 남녀에 따라 얼마나 다른지 경험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남자친구가 없었던 그녀는 과제를 위해 사촌오빠의 친구를 소개받았는데, 마침 그가 영화광(狂)이었던지라 과제를 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과제를 마무리하고 1주일쯤 지났는데 사촌오빠 친구가 전화를 했기에, “리포트 제출은 끝났는데요” 했더니 “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더라는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진지하게 데이트를 시작했고 결혼식장까지 함께 들어갔다는 것이 제자의 사연이었다.

오랜만에 제자들 얼굴을 떠올리자니, 녀석들 덕분에 세상 돌아가는 변화를 실감하게 되는구나 싶다. 한 달 전에도 이메일을 통해 “교수님! 드디어 결혼이라는 것을 해보려 합니다. 결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착한 남자와 함께 하나씩 배워가려 합니다”란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다. 첨부된 파일에는 정말 착하게 생긴 신랑과 얼굴을 맞댄 채 활짝 웃는 제자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신랑이 일본 시민단체에서 일하다 만난 한 살 연하의 일본 남자였음은 신선한 반전이었고.

두어 주일 전에도 “교수님, 여긴 칠레예요.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요, 이곳에서도 제 영화 소품을 상영하게 되었어요”라는 제자의 소식이 날아왔다. 석사 논문만 남겨 놓은 녀석인데 갑자기 무엇에 홀린 듯 영화판에 뛰어들었다가 지금은 지구 저 편 칠레에서 영화 작업을 한다니, 여전히 도깨비 같은 녀석에게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것 실컷 후회 없이 하라”는 응원의 답장을 보내주었다.

한데 요즘은 ‘첫눈 오면 휴강’이란 공지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학생들로부터 “교수님, 눈이 조금 날리다 그쳐도 첫눈이라 할 수 있나요?” “2시부터 수업인데 12시에 눈이 그치면 그래도 휴강인가요?” “첫눈과 휴강은 무슨 관계가 있나요?” 등의 질문을 받고부터이다. 첫눈의 낭만과 함께 가끔씩 얼굴 떠올릴 제자들도 하나둘씩 사라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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