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로] 정보통신 기술발전의 그늘에도 따스한 눈길을

입력 2018-12-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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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몇 해 전 대형 양판점으로 위축된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해 의무휴업일을 정할 수 있도록 유통산업발전법이 개정됐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몇몇 양판점이 이 법 시행으로 영업의 자유를 침해받았다며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했으나, 헌법재판소는 위헌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전통시장 보호를 위해서다.

필자 가족은 개인 차원에서 지역 상권 보호를 위해 양판점과 전통시장에서 사야 할 품목을 나누어 쇼핑하는데, 양말이나 내의는 전통시장 구매 품목에 들어 있다. 한번은 자주 가는 동네 전통시장에서 내의를 샀다가 다른 품목으로 교환하려고 했는데 가격이 맞지 않아 부득이 주문을 취소해야 했다. 그런데 칠십대 중반은 돼 보이는 주인 할머니는 무조건 안 된다며 거부했다. 합리적 이유를 대지 않아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래서 전통시장이 고객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거지’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주문 취소 후 새로 구입하려고 했던 물건을 사지 않는 소극적 대응이 전부라는 생각으로 뒤돌아섰다.

가게를 나가면서 보니 현금출납기 옆에 손으로 쓴 매뉴얼 비슷한 것이 눈에 띄었다. 짧은 순간 신용카드 결제를 취소하고 새로 주문하는 것에 할머니가 익숙지 않아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신 취소해 드리겠다고 하니 할머니는 두꺼운 마분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메모지를 건네주며 직접 해보라고 했다. 아마도 자녀가 써주었으리라. 간단한 것인데도 기계를 조작하는 것에 서툰 할머니는 본의 아니게 손님에게 퉁명스럽게 대했던 것이다. 다 하고 나니 심술 사나운 할머니로 알았던 가게 주인에게 그런 얼굴이 있었나 싶게 환하게 웃으신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양말 한 켤레를 덤으로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새로운 디바이스(device)에 대해 얼리어댑터(early adapter) 정도는 아니지만 전공 특성상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을 접할 기회가 많다. 그런데도 학교나 외부 연구기관과 전산으로 행정 업무를 처리할 때 가끔은 마치 바보가 된 듯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주 바뀌는 전산시스템하에서 일을 처리하는 경우 - 그것이 대학이든 관공서든 - 몇 번의 실패 경험이 있기에 서두르지 말고 차분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 그런데도 때로는 두어 시간을 허비하고도 끝까지 못하고 만다. 패배감과 동시에 화가 난다. 본업인 연구와 교육에 쏟아야 할 시간에 전산 전문가 훈련을 받고 있다니….

매번 반복하듯 담당자에게 전화를 한다. 담당자는 선심 쓰듯 이번에 한해 처리해주겠다고 하며 컴퓨터 간 연결을 한다. 컴퓨터 화면에서 원격으로 조종되는 커서가 움직이는 것을 보노라면 누군가 내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도 같고, 내 집 안을 샅샅이 훑어보는 것 같아 영 기분이 개운치 않다. 마분지에 적힌 대로 카드 단말기를 조작할 때 곁에서 지켜보던 할머니의 긴장된 표정이 꼭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처리하고 나면 공연히 아까운 몇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맡길 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전산 전문가가 될 수는 없다. 기계어, 컴퓨터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일반인들이 기계를 잘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이 기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에 맞추도록 말이다. 이제 몇 년 지나면 카드 단말기에서 주문 취소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사람과 주문 취소 정도가 아닌 다른 기계 처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영어 능력이나 컴퓨터 등 기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의 차이(디바이드)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혀지고 있지만, 기술의 발전은 또 다른 디바이드를 지속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차는 액셀러레이터만 뛰어나선 안 된다. 브레이크가 잘 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액셀러레이터를 마음껏 밟을 수 있다. 정보통신 기술 발전에 따른 그늘에도 따스한 눈길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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