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아직도 수첩을 사용하시나요?

입력 2018-12-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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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맘때가 되면 해를 거르지 않고 꼭 해온 나만의 의례(?)가 있다. 학교 생협(生協)에 가서 빨간색 표지의 새해 동창회 수첩을 산다. 그런 다음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가족들의 생일을 적어 넣는다. 가족 중 제일 먼저 생일을 맞는 주인공은 호랑이 해 1월 26일 태어난 조카 녀석이다. (친정) 여동생이 서른여덟에 낳은 외동아들이니 ‘그 소중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오’이다.

뒤늦게 아들을 선물로 얻은 여동생은 소띠에 음력 8월 7일생이다. 음력 8월생 소로 말할 것 같으면 수확을 앞두고 1년 중 가장 뼈 빠지게 일하는 시기라 평생 고생스러운 팔자임이 분명한데, 여동생은 다행스럽게도 소가 배불리 먹은 후 늘어지게 낮잠 자는 시간에 태어났기에 편안한 팔자로 살 거라는 이야기를, 집안 어르신들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형제자매는 모두 음력 생일을 지낸다. 음력 생일은 해마다 날짜가 바뀌기에 깜빡하면 놓칠 수가 있어 미리미리 적어두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아니면 누구나 한번 들으면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지만 아무도 챙겨줄 수는 내 생일 탓에, 주위 가족들 생일을 열심히 챙기려 하는지도 모를 일이고.

나는 섣달 그믐날, 그러니까 음력 설 하루 전날 태어났다. 엄마는 ‘정월 초하룻날 딸이 태어나면 팔자가 드셀 텐데…’ 한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한데 뱃속의 딸은 신통하게도 엄마 마음을 헤아렸던지 그믐날 새벽에 세상에 나왔다는 게다. 그해 우리 집에선 설 명절과 제사를 생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음력 설 준비하느라 분주하기 이를 데 없는데 아들도 아닌(!) 딸 생일 챙겨줄 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기에, 나는 대학 졸업 때까지 한 번도 생일상을 받아보지 못했다.

가족들 생일을 수첩에 적다 보니 하나 둘 새로운 가족이 늘어나면서 기억해야 할 생일도 늘어만 간다. 유독 아끼는 조카나 손주들 생일엔 커다란 동그라미를 쳐두거나 하트를 그려넣기도 하고, 때론 조카들 결혼기념일까지 적어두는 오지랖을 떨기도 한다. 예전 어르신들께선 겨울에 태어나면 키가 안 큰다고 걱정하셨건만, 우리 집엔 12월 23일에 생일을 맞는 주인공이 세 명이나 되는데도 남녀 불문 모두 키가 장대 같으니, 옛말도 틀릴 때가 있는 모양이다.

마지막으로는 부모님 기일을 적어 넣는다. 한 분은 8월 여름방학 때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1월 겨울방학 때 돌아가셨다. “두 분 모두 바쁜 따님들 배려해서 방학 때 돌아가신 것 같다”고 하시던 문상객들 말씀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새 수첩에 생일과 기일을 다 적고 나면 헌 수첩을 펼쳐서 지난 한 해 어떻게 살아왔나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1월부터 12월까지 한 장씩 넘겨가노라면 ‘5월과 10월이 유독 일정이 빡빡했구나’, ‘학기말은 올해도 정신없이 보냈구나’를 음미하게 된다. 25년 넘게 사용해온 빨간 수첩은 한 달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눈에 들어와 좋고, 한 달 단위로 시간이 흘러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 또한 좋다.

누군가는 하루에 해당하는 칸이 너무 좁아서 하루 일정을 모두 다 적어 넣을 수 없어 불편하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불만이 없다. 마음속으로 ‘하루 한 칸에 적을 수 있는 일정만 예스(yes)하자. 한 칸에 다 적을 수 없는 일정은 노(no)하리라’ 다짐하곤 하니 말이다.

수첩을 펴들고 메모를 할라치면 ‘아직도 수첩을 사용하시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자판을 두드리는 모습에 비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수첩 위에 무언가를 긁적이는 내 모습은 참으로 구식(舊式)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난 내년에도 후년에도 십년 후에도 빨간 수첩 위에 손주들 생일을 하나하나 적어 넣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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