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행복은 파랑이다

입력 2018-12-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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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인문학 저술가

맹추위가 이어지는 겨울날이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 속에서 하천은 꽝꽝 얼고, 북풍은 거세진다. 한해살이풀들은 시들고 말라서 바람 속에서 바스락거리고, 들판의 버드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헐벗은 채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오후 무렵 나는 파주 출판단지 안 버스정류장에서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기다리는 것은 항상 늦게 도착한다. 그런 지체와 지연의 느낌을 만드는 것은 기다리는 자의 내면에 쌓이는 고독과 권태다. 파란 하늘은 쨍한 냉기를 품고 펼쳐졌다. 추위로 손은 곱아서 뻣뻣해지고, 비강 점막에 와닿는 싸늘한 공기는 식초인 듯 따갑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불현듯 파주의 겨울 한가운데 들어섰음을 깨닫는다. 겪어 보니, 파주의 겨울 추위는 맵다.

한 해도 끝자락이다. 자영업자들은 깊은 불황에 시름 덜 날이 없고, 청년들은 취업 절벽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권력을 쥔 자들의 ‘갑질’은 그치지 않고, 거짓과 위선의 말들이 난무하는 아수라 속에서 누구에게나 삶을 견디는 일은 가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남은 건 다행한 일이다. 서로의 축 처진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했어, 라고 격려해 주면 좋겠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이룬 것이 없이 한 해를 허둥지둥하며 흘려보냈을 뿐이다.

새해 첫날 품었던 꿈과 계획은 여지없이 어그러졌다. 내 게으름이나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어떤 것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는/땅의 토질이 나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나무가 못생겼다 욕하기 마련이다.”(「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땅의 토질이 나쁜 것은 나무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제 불운한 처지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끔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도피한다. 지금보다 나은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내 삶은 달랐을 것이라고. 하지만 카리브해에 산다고 다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늘 그렇듯이 삶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에는 예상치 못한 날씨와 우연의 일들이 난기류와 같이 끼어든다. 지난여름, 독일 여행 중에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는 데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서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그 사태는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항공권을 내보이면서 탑승 시각이 촉박함을 호소해도 그들은 귀담아듣지 않고, 다만 기다리라고만 말했다. 이렇듯 내 힘과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긋나 버린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아쉽게 한 해를 마감하면서 가슴을 파고드는 한 줄기의 공허함은 어쩔 수 없다. 사는 게 거친 세월을 무두질하며 묵묵히 나아가는 일임을 새삼 자각하지만,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생각이다.

젊은 날엔 사막 어딘가에 푸른 수맥(水脈)이 있다고 믿었다. 나의 시대는 어두웠다. 일자리는 드물어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들끓고, 나는 취약한 삶을 품은 채 학살자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잠들었다. 꿈과 이상은 고귀했으나 힘은 없었다. 나는 겨우 노트에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시나 적는 청년이었다. 그런 메마른 시절에 꿈 한 조각이라도 품지 않는다면 눈앞의 가파른 길을 가야만 하는 팍팍함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난은 늘 마음이 누추한 데 나앉은 듯 시린 일이고, 좌절은 밥 먹듯이 삼켜야만 했다.

하지만 꿈은 어둠 속에서 더 잘 꾸는 법이다. 남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어딘가에 숨은 행복을 찾으려고 등뼈가 휘도록 일하며 노심초사와 전전긍긍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했건만 그 땀과 노고는 공중부양의 시도인 듯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게 백일몽이라는 깨달음은 뒤늦게 왔다. 세월이 더 지나 저 혼자 행복하겠다고 허겁지겁 사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사막 속 푸른 수맥이 되려는 발심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어제 읽은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에서 본 한 구절이 마음 한쪽을 물들였다. “예전부터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의 가장 먼 가장자리에 있는 푸름에 마음이 움직였다. 지평선의 색, 먼 산맥의 색, 무엇이 되었든 멀리 있는 것의 색인 푸름에, 그렇게 먼 곳의 그 색은 감정의 색이고, 고독의 색이자 욕망의 색이고, 이곳에서 바라본 저곳의 색이고, 내가 있지 않은 장소의 색이다. 그리고 내가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의 색이다.” 이 구절이 내 마음의 한가운데를 두드려 맑은 소리가 울려 나오게 했다. 그 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불현듯 시골에 살던 어린 시절로 달려간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논산과 강경 사이의 평지 마을은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현기증이 날만큼 너른 들을 낀 농촌이었다. 먼 곳에서 연이어진 산들은 마을과 낮은 구릉, 논밭을 병풍처럼 감쌌는데, 멀리 물러앉은 산들은 푸른 덩어리로 보였다.

저 산들은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 어린 나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먼 거리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거였다. 그때 나는 세상이 가까운 곳과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이루어졌음을 이해했다. 10대 때는 혼자 방바닥에 엎드려 지리부도를 펼쳐보며 먼 곳, 내가 가보지 못한 상상의 장소들, 그 이국의 아름다운 지명을 외우는 게 취미였다. 교토, 오사카, 홍콩, 방콕, 이스탄불, 아테네, 피렌체, 리스본,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코펜하겐, 헬싱키, 오슬로, 스톡홀름, 암스테르담, 리우데자네이루, 샌프란시스코…. 내가 어렸던 1960년대의 기억에서 푸름은 먼 곳, 낯설고 광막한 먼 곳, 그 동경과 욕망의 장소를 물들인다. 그 푸름을 볼 때마다 언젠가 저 먼 곳을 가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설레었는데, 그것은 내 최초의 동경이고 그리움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테다. 몽환적인 푸름에 감싸인 먼 곳을 동경하고, 먼 곳에 일어나는 일들을 꿈꾼 것은. 푸름은 대기 속에서 산란하는 빛이 만든 허상일 테지만 나는 자주 푸름에 매혹되었다. 하지만 열 살 때 시골을 떠나 도시로 나온 뒤 나는 오랫동안 그 푸름을 잊고 살았다. 레베카 솔닛이 “세상은 가장자리에서, 그리고 깊은 곳에서 푸르다. 이 푸름은 사라진 빛이다”라고 말한 그 푸름, 사는 게 늘 팍팍해서 내가 멈춘 곳에서 가장 먼 쪽을 물들이던 그 푸름, 사라지는 빛에 잠긴 아름다운 세상을, 나는 잊고 있었다. 마흔이 넘어 서울 살림을 접고 시골로 내려와서 나는 비로소 다시 그 푸름과 만난다. 가을 저녁 이내가 밀려들 무렵 나를 둘러싼 산과 물은 온통 푸른색에 잠긴다. 먼 곳의 푸름이 가까이 다가와 세상을 감싸는 것이다. 그런 저녁, 나는 푸른 이내의 세상에 감탄하며 감사하곤 했다.

행복을 표상하는 색깔은 아마도 가장 먼 영역을 물들이는 파랑일 테다. 파랑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가장 먼 곳의 색깔이다. 당신, 행복을 찾지 마세요. 행복은 무한, 불가능성, 손에 쥐어지지 않는 무(無)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요. 온통 푸름으로 물든 청산과 푸른 물, 파랑새는 항상 멀리 있다.

이제 나는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도도 없고, 행복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나침반도 없다는 것을 안다. 만약 어딘가에 행복이 있다면 스스로의 감각에 의지해 찾아야만 한다. 오늘의 삶이 답답하고 행복의 날이 아득히 멀리 있는 듯해도 지금 살아 있고 심장이 뛴다면, 우리에겐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오늘의 실패를 이겨내고 불행을 견딘다면 더 나은 날이 올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의 아름다운 순간들, 그 작은 행복에 집중하자. 내 가까이에 있던 푸름, 그 사라지는 빛에 감싸인 채 멀어진 장소들, 그곳을 찾아서 묵묵히 걸음을 옮겨야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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