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식의 시사 인문학] 先例가 반드시 善例는 아니다

입력 2019-01-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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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칼럼니스트

경제용어 중에 ‘악대차(樂隊車) 효과’ 또는 ‘밴드왜건(band wagon) 효과’가 있다. 상품을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행에 따라서 사거나 소비하는 현상을 뜻한다. 곡예나 퍼레이드의 맨 앞에서 행렬을 이끄는 악대차가 사람들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내는 데서 유래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밴드왜건은 악대를 선두에 세우고 다니는 운송수단으로 요란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이런 밴드왜건을 통해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서부로 몰려갔다고 한다.

쿼티(qwerty) 효과 또는 선점(先占) 효과도 있다. 오늘날 영문 타자기의 표준적인 키 배열을 보면 좌측 상단에 ‘QWERTY’ 순서로 돼 있다. 이 배열 순서는 타자기가 수동이었던 시대에 타이핑을 하면서 키가 서로 엉키지 않게 하려고, 즉 타자 속도를 일부러 늦추도록 설계했던 데서 나왔다. 타자기 관련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키가 엉키는 문제가 완전히 없어진 시점에 이르러서는 훨씬 효율적인 키 배열로 바꾸는 게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에게 이미 익숙하고 친숙해진 배열을 바꾸어 새로운 키 배열을 보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QWERTY 배열은 그 비효율성이 인지됐지만 지금까지도 마치 무슨 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굳건히 남아 있다.

밴드왜건·경로의존성…관행의 힘

악대차 효과나 쿼티 효과 모두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e)’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관습이나 문화, 법률이나 제도, 심지어 과학 지식이나 기술도 일단 형성되면 그 내용이나 형태가 달라지지 않고 존속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당초 생겨난 요인이나 조건이 달라지더라도 일단 생겨난 길(경로)은 마치 절대적 법칙이나 원칙인 것처럼 끈질기게 작용한다.

우연적 요소가 적지 않게 반영된 최초의 대응 방식이 일종의 모범적 사례로 작용한다. 어떠한 방식이 과연 합리적이고 적절한지, 그리고 이후의 비슷한 상황에서도 적합성을 지니는지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당초에는 비교적 합리적인 관행이나 관습이 나중에는 아무런 합리성도 없이, 그야말로 타성에 의해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수가 적지 않다. 관행의 발생은 우연적이고 미약하지만 나중에 지니는 힘은 강력해진다.

집단적 대응 방식이 관행이나 관습이라면, 개인의 행동양식은 습관이라고 볼 수 있다. 관행이나 습관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실제로 인간은 살아가면서 대체로 습관적으로 행동하고, 관행이나 관습에 따라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킨다.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간에, 만일 인간이 매사를 사생결단의 중대사처럼 고민하고 결단하여 행동한다면 자연스러운 삶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결국 상당수의 습관이나 관행이 개인적 사회적 생활 자체를 가능케 하는 긍정적 측면을 지님을 깨닫게 된다.

▲사법농단 핵심 피의자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설치된 포토라인의 모습. 포토라인 제도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는 순기능도 있지만, 거물급 피의자에 대한 뻔한 질문과 뻔한 대답이 오가는 장면이 과연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뉴시스
▲사법농단 핵심 피의자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설치된 포토라인의 모습. 포토라인 제도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는 순기능도 있지만, 거물급 피의자에 대한 뻔한 질문과 뻔한 대답이 오가는 장면이 과연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뉴시스

포토라인, 뻔한 질문-뻔한 답변

언론 보도를 접하다 보면 포토라인에 선, 정치계나 재계, 법조계 등의 ‘거물’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많은 국민의 관심을 끄는 사람에 대한 언론기관들의 취재 경쟁이 과열되다 보면 예상치 않았던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포토라인은 혹시 발생할 수도 있는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신문사나 방송사 카메라 기자들이 취재원에게 지나치게 접근하지 않기로 약속한 일종의 취재 경계선이다.

거물급 피의자가 마치 얌전한 초등학생처럼 노란 삼각선 앞에 발을 맞추어 서면, 수백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그런 다음에는 마이크를 뭉쳐 든 기자가 피의자를 따라가면서 상투적인(!) 질문을 던지고, 피의자는 대체로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다. 피의자가 사뭇 침착한 경우에도 기자의 질문에 대한 반응은 별로 다양하지 않다. 묵묵부답 아니면 매우 원론적인 대답이 나온다. 대답은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 ‘국민에게 죄송하다’ ‘책임을 느낀다’ 중 어느 하나인 경우가 많다.

포토라인 제도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는 순기능을 지닌다는 견해도 있다. 과연 그럴까? 거물급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잠깐 세워놓고 뻔한 질문에 뻔한 대답이나 무응답을 듣고 당황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는 일이 국민의 알 권리를 과연 얼마나 보장해줄까? 혹시 피의자 망신 주기 또는 피의자에 대한 검찰의 기선 제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판일까.

반면에, 포토라인 제도의 역기능은 상식 수준에서도 명확해 보인다. 굳이 초상권 침해니 퍼블리시티권 침해니 하는 어려운 법률용어를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시쳇말로 ‘쪽 팔리게 하는 짓’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명확히 짚어야 할 점은 포토라인에 서는 당사자는 아직 ‘피의자’일 뿐이지,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대체 피의자(被疑者)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범죄의 혐의가 있어서 정식으로 입건되었으나, 아직 공소 제기가 되지 아니한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면, 피의자는 나중에 범죄와 무관하다고, 즉 ‘혐의가 없다’고 법원 판결을 받을 개연성을 충분히 지닌 사람이다.

관행의 힘은 묘한 것이다. 계속 여러 차례 보고 겪다 보면 으레 그러려니 하게 되는 마법의 효능을 지닌다. 사소한 것마저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려는 언론기관이나 매사를 깐깐히 따지기 좋아하는 그 많은 시민단체도 이 포토라인에 대해 문제 제기했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다.

검찰은 왜 구속수사를 원할까

검찰은 범죄가 발생했거나 발생한 것으로 판단되면 범인과 증거를 찾고 수집하는 일, 즉 수사에 착수한다. 범죄 혐의의 유무를 밝혀 공소(公訴)를 제기하기 위해서다.

형사소송법에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이 원칙이라고 명시돼 있다. 검사가 피의자를 구속할 경우 당연히 합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유는 피의자가 일정한 주거가 없는 경우나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는 경우, 또는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경우로 한정돼 있다. 단순화하면, 검찰이 수사할 때 피의자가 증거를 없애거나 도망갈 위험이 없으면 굳이 구속하지 말고 수사하라는 것이다.

간단명료해 보이지만, 실제로 피의자가 증거를 없앨 여지가 있는지, 도망갈 가능성이 있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검찰로서는 구속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도 법원으로부터 기각되는 수가 있다. 피의자를 직접 수사하는 검찰과 피의자와 거리가 있는 법원의 판단에 차이가 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적지 않은 전문가들조차 꼭 구속할 필요는 없는 사안이라고 지적하는 사례에도 검찰이 구속하려고 전력투구하는 경우다. 구속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신청한 영장이 기각당할 때 검찰로서 진한 안타까움을 넘어 ‘열 받는’ 심정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검찰의 지배적 관점은 형사소송법의 기본 정신에 따른 불구속 수사가 아니라, ‘수사 = 구속 수사’라는 도식인 것으로 보인다. 수사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형사소송법의 불구속 수사 원칙을 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검찰의 이런 행태는 ‘검찰의 오래된 관행’이라는 표현 말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폐기, 타파돼야 할 관행이, 고도의 지성과 균형감각을 갖췄으리라고 기대되는 검사들로 구성된 검찰에서도 굳세게 작동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관행의 타당성을 저울질해보자

정치계, 재계, 법조계 등의 거물급 인사들이 심심찮게 포토라인에 서고 또 구속되기도 하는 시국이다. 분야마다 각양각색의 관행이 생겨나고 없어지기도 한다. 관행들 중에는 문제 해결에 좋은 열쇠 구실을 하는 게 있는가 하면 서둘러 폐기해야 할 악습 또한 적지 않다. 선례(先例)가 반드시 좋은 사례[善例]는 아니다.

인권과 자유가 진정으로 존중받는 사회로 가려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관행에 대해 그 타당성을 저울질해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재평가 과정을 통해 보편 타당성이나 실제적 효용이 별로 없는 관행은 과감히 폐기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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