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블루베리 농장의 봄 소식

입력 2019-02-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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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겨우내 제대로 된 눈 소식 한 번 없더니만, 입춘(立春)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곳 블루베리 농장에 처음으로 소복하게 쌓일 만큼 눈이 내렸다. 그 위로 보슬비까지 촉촉이 내려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겨울 가뭄 해소되려면 아직 멀었시유.’ 혀를 차는 동네 이장님 얼굴에도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도시의 봄은 여인의 옷차림에서 온다지만, 농촌의 봄은 물오른 과일 나무의 꽃망울에서부터 오는 듯하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도 어느새 포슬포슬해지기 시작했고 와중에 잡초들 기지개 켜는 모습도 보이는 것 같다.

요즘 우리 집 블루베리 농장에선 가지치기가 한창이다. 주변 복숭아 밭이나 배나무 밭 중엔 이미 가지치기를 끝낸 곳도 종종 눈에 뜨인다. 열매 수확한 지 오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새로운 수확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이 돌아온 셈이다. ‘전문직 농부’의 시간 관념은 확실히 어설픈 아마추어 농부와는 다른 데가 있다. 이분들은 지난 2~3년간 나뭇가지들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세심하게 기억함은 물론이요, 앞으로 2~3년 후엔 새로운 가지들이 어떻게 벋어나갈지 치밀하게 예측한 상태에서 솜씨 좋게 가지치기를 하니 말이다.

가지치기 할 때의 기본은 ‘괜스레 아까워하지 말고 대범하게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에 있는 듯하다. 그래야만 굵고도 싱싱한 가지를 통해 튼실한 열매를 얻을 수 있음을 그 누군들 부인하리요. 실제로 가지치기를 한두 해만 걸러도 소나무는 나무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과수에는 부실한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리고 말듯, 우리네 인생도 가지치기를 게을리하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긴 어려울 것 같다.

가지치기와 더불어 이 계절엔 꽃망울 따기도 필수다. 블루베리는 꽃망울 하나에서 열 송이 이상의 꽃을 피우고 각 송이마다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게 되니 꽃망울은 서너 개만 남겨두는 것이 현명하다. 꽃망울을 따노라니 몇 해 전 서리태(검은 콩)를 심고 싹을 틔우던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속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했었다. 한날한시에 심은 콩 떡잎이 어찌 그리도 천차만별로 솟아나던지, 도시에서 자란 촌티(?)를 풀풀 내며 신기해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면 될성부른 떡잎뿐만 아니라 될성부른 열매 또한 꽃망울부터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식물학자의 확인을 받아야 하겠지만…). 수세(樹勢)가 좋은 블루베리일수록 적당히 굵은 가지마다 탱글탱글한 꽃망울을 달고 있다. 반면 같은 해에 심었음에도 묘목이 나빴든지 토양이 안 맞았든지 배수가 안 되었든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가지가 지지부진하게 올라오는 블루베리일수록 꽃망울도 영 시원치가 않다. 눈 딱 감고 작고 초라한 꽃망울들을 잘라내자니 ‘사람들 욕심 때문에 죄없는 너희들이 희생되는구나’ 하는 객쩍은 생각에 얼굴이 화끈해지기도 한다.

꽃망울 중엔 벌써 까맣게 얼어버린 것들도 빈번히 눈에 뜨인다.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면 봄이 온 줄 알고 일찍 꽃망울을 터뜨렸다가 그만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얼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성미 급한 사람이 손해를 보듯 꽃망울 세계에서도 느긋함이 미덕일 것 같다.

이미 조금 늦긴 했지만 더 늦어지기 전에 블루베리 밭에 퇴비도 넉넉히 얹어주어야 한다. 열매 맺는 시기는 6월부터지만 오래전에 잎도 무성하게 만들어 주고 꽃도 소담스럽게 피워내고 벌들도 가득 초대하려면 미리미리 뿌리에 영양분을 공급해주어야 한다.

나무는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고 일러주신 말씀, 나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세심하게 귀 기울여 들어 보라는 말씀, 봄은 가을을 준비하는 계절이란 말씀. 말 못하는 나무들 키우면서 보석 같은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되니 몸은 분주해도 마음은 부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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