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열린 주요 대선후보 4인의 첫 법정 TV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우리나라의 ‘기축통화국 편입 가능성’을 거론한 것을 두고 여론이 뜨겁습니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화폐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냐” “이 후보가 참고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보고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에 대한 이야기지 기축통화와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다”라는 지적에서부터 ‘가축통화’ ‘귀축통화’ 등 조롱 섞인 말들도 이어졌습니다.
이 후보의 주장은 과연 맞는 말일까요?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이날 토론 초반,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이재명 후보는 재정건전성과 적정 국가부채 비율을 놓고 공방을 벌였습니다. 윤 후보는 이 후보의 “국채는 국민이 가진 국가의 부채이기 때문에 한 나라로 보면 왼쪽 주머니, 오른쪽 주머니가 같은 것”이라는 과거 발언을 언급한 뒤 “국채는 얼마든지 발행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이 후보는 “한국의 가계부채 비중은 전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편”이라며 “국가가 가계소득 지원을 안 하고 부담을 떠넘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윤 후보는 다시 “국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몇 %까지 발행하는 것이 맞느냐”고 물었고, 이에 대해 이 후보는 “IMF가 너무 낮게 유지하지 말라고 얘기했다”며 “그러면 (윤 후보는) 몇%를 적정 수준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윤 후보가 “(국가부채 비율이) 50~60% 넘어가면 비(非)기축통화국은 어렵다고 한다”고 답하자 이 후보는 “우리가 곧 기축통화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맞받아쳤습니다.
또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기축통화국과 비(非)기축통화국의 차이를 아느냐"라고 묻자 이 후보는 “당연히 아는데 우리도 기축통화국에 포함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정도로 경제가 튼튼하다”고 답했습니다.
이 발언 후 온라인에서는 즉각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가축통화’ ‘귀축통화’ 등 제목을 붙인 패러디물까지 나돌았고, 일각에서는 “기축통화가 무슨 상품권이냐”는 등의 조롱 글도 있었습니다.
야당도 강하게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가부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나라를 기축통화국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가슴이 웅장해진다”라고 비꼬았고요. 원희룡 국민의힘 정책본부장은 “이재명 후보님. 우리나라가 곧 기축통화국이 된다고요?”라며 “(경제 멘토인)최배근 교수가 그러던가요? 아니면 김어준씨?”라고 했습니다. 박민영 국민의힘 청년보좌역은 “민주당에서 이재명 후보의 ‘곧 우리나라도 기축통화가 된다’는 발언이 전경련의 보고서를 참고한 거라고 해명했다. 전경련에서 언급한 것은 IMF의 특별인출권인 SDR(special drawing rights)에 대한 이야기로, 기축통화와는 전혀 무관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기축통화란 국제외환시장에서 금융거래 또는 국제결제의 중심이 되는 통화로 현재 기축통화라 할만한 통화는 미국 달러가 유일합니다. 무역이나 금융 거래도 달러 표시가 많고, 각국의 외환보유액도 달러화가 가장 많습니다.
기축통화는 통화 가치에 대한 신인도와 편의성 2가지 관점에서 다른 통화에 비해 우월한 통화가 자연스럽게 그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신인도와 편리성은, 환율이나 금리가 예측 불가능하게 변동하지 않고, 매매하고 싶을 때 항상 거래 상대를 발견할 수 있는 안정감이 있는 것입니다.
통화가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크게 2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 그 통화를 보유한 나라의 경제 규모와 금융 시장이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클 뿐만 아니라 질도 중요합니다. 강도와 규율을 갖춘 금융기관이 시장 참가자의 주류를 차지하고, 환율이나 금리 등 가격 형성의 투명성이 높아야 합니다. 독립된 금융감독자와 중앙은행이 시스템 전체의 수호자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셋째로, 이 체제가 그 누구의 침입도 받지 않고 지켜나갈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여러 조건들을 충족하는 나라는 현재 전 세계에 미국뿐입니다.
이날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이재명 후보가 인용한 자료는 “원화가 IMF의 SDR 편입 조건을 충족한다”는 내용의 2월 13일자 전경련 자료였습니다. 전경련은 당시 보도자료에서 원화가 IMF의 SDR 통화바스켓에 포함될 수 있는 5가지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올해 중순 열리는 IMF SDR 통화바스켓 통화 구성과 통화별 편입 비중 등을 검토하는 IMF 집행이사회를 염두에 둔 자료였지요.
전경련은 원화의 IMF SDR 바스켓 편입 근거로 △한국이 글로벌 경제대국이자 무역 선진국이라는 점 △세계 최초로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도약했다는 점 △IMF가 제시한 SDR 편입 요건 중 하나인 수출 조건(세계 5위)을 충족시키겠다는 점 △정부가 원화의 국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 등을 꼽았습니다.
전경련은 원화가 SDR 바스켓에 편입될 경우 장단기적 경제효과는 112조8000억 원으로 실질 GDP(2021년 기준)의 5.3%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또 기축통화로서 누리는 경제적 이익을 의미하는 세뇨리지효과는 87조8000억 원, 환율 불안정성 38.5% 감소에 따른 수출 증가 15조6000억 원, 국고채 금리의 0.63% 하락으로 경감되는 이자부담 9조4000억 원으로 분석됐습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전경련의 자료는 “원화가 IMF의 SDR 편입 조건을 충족한다”는 것으로, 이재명 후보가 언급한 “우리나라가 기축통화국 될 가능성 있다”는 내용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SDR는 기축통화에 대한 교환권을 말하는 것이지 기축통화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SDR는 IMF 회원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담보 없이 인출할 수 있는 가상의 국제준비자산으로, 회원국은 협약에 따라 SDR 바스켓의 5개 통화와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갖습니다.
IMF의 SDR 바스켓 구성 통화를 보면 미국 달러(구성 비율 41.73%), 유로(30.93%), 일본 엔(8.33%), 영국 파운드(8.09%), 중국 위안(10.92%)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달러를 제외한 4개 통화는 신뢰도나 사용도 면에서 기축통화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은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인 달러화 패권에 도전하기 위해 부단히 공을 들여왔습니다. 그런데도 중국 위안화가 미국 달러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0)’라는 게 중론입니다.
IMF에 따르면 2019년 9월 말 시점에 글로벌 외환보유고에서 차지하는 위안화 가중치는 2%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미국 달러는 61.8%, 유로는 20.1%, 엔은 5.6%에 이른다.
중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자국 통화의 폭넓은 국제거래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한 나라의 통화가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통화가 될지 여부는 그 나라의 의도나 야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죠.
기축통화를 꿈꾸는 중국 위안화는 어느 단계까지 왔을까요?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단, 경제 규모 면에서 위안화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중국의 경제 규모는 이미 10년 전에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에 올랐습니다. 중국의 GDP는 세계의 16%를 차지하며, 현재 24%로 1위인 미국을 2030년까지 제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러나 위안화가 두 번째 요건인 ‘신뢰성’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요원해 보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후 중국이 위안화의 국제화를 노리고 금융 자유화 등 개혁을 진행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2015년 환율 변동 유연화 후 위안화 가치 하락과 자본 유출이 멈추지 않아 크로스보더 자본거래를 대폭 규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안화는 2016년 SDR 바스켓에 진입하는 등 국제통화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현재도 자본거래에 엄격한 제약이 있습니다. 자본거래를 자유화해도 자본 유출 등의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과잉채무나 금융시스템의 취약성 등 오랫동안 현안이 되고 있는 구조적인 과제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또 중국이 구조개혁에 성공해 자본거래와 환율변동의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고 해도 마지막 관문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 달러가 갖는 네트워크 외부성입니다. 유동성과 개방성이 높은 금융시장 등 한 번 확립된 미국 달러 중심의 국제결제 인프라는 그 우위성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중국이 미국 등 다른 선진국들보다 디지털 통화 도입을 서두르는 이유입니다. 디지털 세상에서라도 패권을 잡으려는 것이죠.
이처럼 기축통화국은 중국도 이루기 힘든 꿈인데, 한국 원화가 기축통화가 될 가능성은 있을까요?
이재명 후보는 전경련의 자료를 근거로 “우리나라가 기축통화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요. 원화가 IMF의 SDR 바스켓에 편입하게 된다고 해서 기축통화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죠.
일단, 전경련의 주광호 경제본부장은 IMF가 제시한 SDR 바스켓 편입 조건과 한국의 경제적 위상을 감안할 때 원화 가치는 충분하다고 봤습니다. 블룸버그는 2015년 위안화가 바스켓에 편입될 때 다음 편입 통화 후보 1순위로 원화를 꼽은 바 있습니다. 2위는 싱가포르달러, 3위는 캐나다달러였습니다.
원화가 IMF의 SDR 바스켓에 편입하게 된다면, 기축통화의 요건 중 신인도나 편의성에서 일부 도움은 되겠지요. 특히 글로벌 유통이 늘겠지요. 원화의 국제거래 비중은 1992년 0.1%에서 2020년 4.9%로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새발의 피. 원화의 기축통화화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경제 규모는 물론, 이를 떠받칠 펀더멘털도 문제고요. 17일 한국경제연구원은 한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다른 비기축통화국과 달리 높은 수준의 재정적자를 지속해 국가 부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연구원에 따르면 2020~2026년 국내 GDP 대비 국가 부채비율 증가폭은 18.8%포인트로 OECD 회원 비기축통화국 17개국에서 가장 높았습니다. 특히 한국은 국가 부채비율이 2020년 47.9%에서 2026년 66.7%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또 2020~2021년 GDP 대비 통합재정수지 적자 규모를 100으로 했을 때 한국의 2022~2026년 GDP 대비 통합재정수지는 88.0이었다고 분석했습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국의 부채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고, 급속한 고령화와 높은 공기업 부채 등 리스크 요인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장기적인 재정 건전성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원화의 국제 신인도 저하로 직결됩니다.
전경련은 대선후보 TV토론에서 기축통화를 둘러싼 논란이 일자 22일 "원화가 SDR에 편입돼도 국가재정 건전성 문제는 거시경제안정성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국제적으로 안전자산으로 인식되어야만, 국제 지급·결제 기능을 갖춘 명실상부한 기축통화가 될 수 있으므로 경제 성장률, 주요 거시경제지표 유지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