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여의도 낱말사전

입력 2023-11-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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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차. 정치부 새내기 기자는 생존법을 터득 중이다. 그중 하나는 나만의 국어사전을 만드는 일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여의도 낱말사전' 정도가 좋겠다. 정치인의 말은 해독이 필요하다. 때론 부침개보다 쉽게 뒤집히고, 또 때론 고차방정식보다 복잡한 셈법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심중에 없는 빈말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뱉는 이들도 있다.

여의도 낱말사전의 기본 원리는 간단하다. 모든 걸 반대로 해석하면 된다. 예컨대, 정치적 발언대에 선 누군가 '존중한다'고 말했다면 '깡그리 무시하겠다'로 받아들이면 된다. '분골쇄신하겠다'는 말은 '천년만년 해먹겠다'로, '시간을 더 달라'는 요청은 '잊힐 때까지 버티겠다' 정도로 알아들으면 적당하다. 정치권에서 '일단락됐다'거나 '갈등이 봉합됐다'란 말이 들려오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조만간 더 큰 파도가 몰려올 조짐이다.

가장 최근 업데이트된 낱말도 있다. '전권'이다. 이 단어는 최근 여당 대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당 쇄신책으로 인요한 혁신위원회를 꾸렸다. 그는 혁신위 출범 당시 "안건 등 제반사항에 대해 '전권'을 부여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말은 불과 한 달이 채 안 돼 뒤집혔다. 그는 혁신위가 자신을 포함한 당 지도부와 중진 의원들에 불출마 및 험지 출마를 권고하자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당 대표 처신은 당 대표가 알아서 결단한다", "일부 혁신위원의 급발진으로 당 기강을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한다"와 같은 거친 발언도 서슴없이 쏟아냈다. 여의도 정가의 '전권 부여'란 '권력은 쥐여주겠으나 내 입맛에 맞추라'의 동의어인 것일까.

여당이 정치 혁신에 여념이 없다. 보궐선거 패배 직후 지도부는 '분골쇄신'을 외치고, 당을 새로운 인물로 채워 넣겠다고 작심 선언했다. 혁신위 발족, 인재영입위원회 구성, 총선기획단 조기 출범도 천명했다. 대표직 사퇴 대신 내민 카드다.

그러고 한 달이 조금 지났다. 그 말은 지켜졌을까. 혁신위가 내보인 2·3호 안건은 연달아 수용되지 못했다. 지도부의 '무한 존중'만 받고 있을 뿐이다. 인재영입위 수장으론 회전문 인사가 들어섰다.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직을 사퇴한 사람이 보름여 만에 떡하니 다시 주요 직책을 잡았다. 새롭고 참신할 리 만무하다.

어쩌면 혁신은 한 번 내뱉은 말을 지키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언젠가 낱말사전을 펼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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