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삼성 내부도 그럴까? 오히려 반대다. 우선 오너가의 경우 직급이나 직위가 사실상 그리 중요하지 않다. 누가 봐도 후계자라는 확고한 자리를 확립한 상황에서 이 부회장은 삼성의 대표자로서 현재 활발한 행보를 하고 있다. 굳이 명목상의 승진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 회장의 건강이 차도를 보이고 있다는 낭보도 나왔다. 삼성 측은 이 회장의 현재 상태에 대해 “심장기능을 포함한 신체기능은 정상을 회복해 안정적인 상태”라며 “하루 15∼19시간 깨어 있으면서 휠체어 운동을 포함한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매사에 신중하고 예의를 먼저 생각하는 이 부회장에게 세간에서 논하는 연말 승진론은 하나의 불경(不敬)스러운 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삼성은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사실 이 부회장에게는 승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놓고 밖에서 거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마주하고 있다.
우선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성장동력이 느슨해진 스마트폰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회경제정책포럼 주최로 열린 ‘최경환 경제팀 100일, 성과와 과제’ 토론회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업들이 과도하게 돈을 쌓아두고 있다. 그러다보니까 돈이 돌지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삼성, 현대차그룹, SK 등 국내 주요 그룹들을 겨냥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대기업들도 어디다가 투자를 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삼성은 과거 제2의 도약을 준비하면서 업계 안팎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이 장악한 반도체에 집중 투자, 성공으로 이끈 사례가 있다. 투자를 주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
문제는 ‘전환기에 봉착한 지금, 과연 어디에 투자하느냐가’가 숙제일 뿐이다. 투자의 방향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갈린다. 최근 삼성이 집중 투자했던 태양광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철수하는 수순이며, 의료기기 역시 지멘스나 GE라는 시장 선점자들에게 밀려 시장 안착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이 가운데, 스마트폰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 아이템이 무엇일지 빠르게 찾아내 집중 투자하는 것이 이 부회장에게는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극복하는 첫 시험무대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삼성가(家)를 다시 화합의 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삼성과 CJ는 고(故) 이병철 선대회장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삼남인 이건희 회장 간 상속 재산 소송의 후유증으로 반목을 이어왔다. 이 때문에 두 그룹은 지난 2012년 호암 이병철 회장 25주기 추모식 참배 방식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2년여가 흘러 이달 19일은 이병철 선대회장의 27주기 추모식이 열리는 날이다.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이 회장은 와병 중이고, 장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구속정지상태로 병원에 있다. 지난 8월 이재현 CJ그룹 회장을 선처해 달라며 이재용 부회장과 어머니인 홍라희 리움 관장 등 삼성가의 사람들이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를 계기로 이번 추모식은 분위기가 사뭇 다를 전망이다. 3년 만에 삼성-CJ-한솔그룹이 함께 하는 가족행사로 치러질 가능성이 크다. 장손인 이재현 회장을 대신해 이재용 부회장이 가족을 대표해 주재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 부회장의 역할이 삼성가를 화합으로 이끌 수 있을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세번째는 삼성을 존경받는 기업의 반석에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의 1차 목표가 재화를 버는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해지는 시점이 왔다. 돈을 많이 버는 기업이 최고라는 1차원적인 목표에서 이제는 존경받는 기업을 목표로 뛰어야 할 때다. 보이지 않는 기업의 가치는 보이는 재화만큼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약간의 이익을 위해 더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삼성은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제1의 기업이다. 재계 서열 역시 1위다. 더 나아가 존경 받는 기업 순위에서 가장 위에 설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이 부회장의 남겨진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