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당시 미래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던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함으로써 헤겔과 마르크스, 그리고 엥겔스로 이어졌던 변증법적 역사발전 법칙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의 역사 논쟁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후쿠야마의 주장과 달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승리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시간이 흘러 1998년 독일의 울리히 벡은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를 출간했다. 동유럽 공산주의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끝날 것 같았던 서구와 동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연과 사회, 좌파와 우파 등의 적대적 대립이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후쿠야마가 자신있게 외쳤던 역사의 종언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래서 후쿠야마 자신도 1999년 ‘역사는 붕괴와 재건을 되풀이한다’며 견해를 변경했다.
울리히 벡의 책 제목처럼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는 오히려 더 많은 적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도래하게 했다.
명백하게 보이던 적이 사라진 순간,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적을 찾아야 했고, 만들어내야 했고, 그렇게 수많은 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후쿠야마와 울리히 벡의 주장을 이야기한 것은, 그들의 주장이 단순히 서구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보편성을 획득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를 보자. 정치적으로는 ‘종북좌파’라는 주홍글씨가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좌좀’이니 ‘수꼴’이니 하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모든 논쟁은 이렇게 블랙홀에 빠져버린다. 합리적인 토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회색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 이것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심판자 위치에 서 있다. 대통령 비판도 친북으로 몰리는 판이다.
금융투자업계만 보더라도 그렇다. 주가 부진으로 ‘녹인’ 공포감이 조성됐던 ELS(주가연계증권)라는 파생상품은 마치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을 연상할 정도였다. 있어서는 안될 그런 존재처럼 심판을 받았다. 실제로 집중포화를 받았던 ‘종목형 ELS’의 경우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이미 불가촉 상품이다.
불특정 다수 대중의 편을 들어주는 포퓰리즘적인 언사들과, 줏대없는 금융당국의 소비자 보호 운운은 가히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투자활성화라는 목적을 가진 자본시장통합법은 소비자보호법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ELS가 심판받은 자리에 DLS(파생결합증권)라는 상품도 끌려나오고 있다. 아마 DLS가 물러나면 ETF, ETN도 줄줄이 끌려나올 것이다. 브라질 채권도 끌려나올 것이고, 일본 증시가 하락하면 일본주식에 투자한 펀드도 끌려나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중국 투자상품은 이미 오래전부터 심판받았고 금도, 석유도, 곡물상품도 모조리 끌려나왔거나 끌려나와야 할 판이다.
이런 여론에 감히 맞서는 것은 엄두내기 힘들다. 비난에 직면해야 하고, 비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증권사들 편들어주느냐는 타박이 날아온다. 힘없는 소비자 편을 들어야지 왜 강자 편을 드느냐고 한다.
균형감과 사려깊은 탐구는 사라졌다. 책임감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공포를 팔아 잇속을 채우는 무리들이 가득하다. 언론이라는 워치독은 감시자를 넘어 심판자가 되었고, 절제력을 상실한 권력은 자유의 공기를 억압하고 있다. 심판대에 올려 세울 악을 찾아 헤매는 번득이는 눈빛만 가득하다.
냉전이라는 벽이 사라진 지 25년. 한반도에는 ‘종북좌파’라는 공포스러운 괴물도 살고 있고, 포스트 모더니틱한 대립과 갈등이 좀비처럼 득실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좀비 같은 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 비극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악을 만들어내는 괴물들과 맞서 싸울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자신과 싸울 용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