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의 법칙이 달라지고 있다.
그동안엔 전 세계 경제에 유가 상승이 가져오는 손해를 분석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리고 이를 좌우하는 ‘보이는 손’은 단연 석유수출국기구(OPEC)였다. 그러나 각자의 이해가 엇갈리는 가운데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
결국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의 법칙이 더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될 전망이다. 미국의 셰일 혁명은 공급량을 늘려놨다. 그러나 전 세계적 불황으로 원유 수요는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유가는 더 하락할 공산이 크다.
◇ ‘종이 호랑이’ 된 OPEC…유가 추가하락 불가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OPEC 총회를 이틀 앞둔 26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주요 4개 산유국이 사전 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감산 합의에 실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라크와 이란, 쿠웨이트, 베네수엘라에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12개 OPEC 회원국들은 전 세계 원유 공급량의 40%를 담당하고 있다. 회원국은 현재 하루 3000만배럴로 정해져 있는 원유 생산량을 어떻게 할 것인지 협의할 계획이었다. 감산하지 않으면 떨어지고 있는 유가엔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게 생겼다.
OPEC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하루 원유 생산량을 420만배럴 줄였다. 그러나 수직 낙하하는 유가를 고려할 때 하루 생산량을 100만~150만배럴은 더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많지만 뜻을 모으지 못했다.
OPEC 내 이견이 커지며 영향력이 떨어지는 한편으로 비 회원국인 러시아와 노르웨이, 멕시코 등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온다.
알 아티야 전 카타르 석유장관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더 이상 OPEC 홀로 국제유가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면서 이들 국가도 OPEC 총회에 함께 참석해 논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아티야 전 장관은 "국제 원유시장에서 공급은 하루 200만배럴 과잉 상태며 전 세계 경제 성장률은 떨어져 수요도 줄고 있다"며 "미국이 더 이상 원유 수입국이 아니라 수출국이 되고 있다는 점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위기에 빠진 러시아 경제…미국 경제엔 `훈풍`
러시아와 베네수엘라 등 주요 산유국들의 경제엔 비상등이 켜졌다. 이들 국가 재정은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는 되어야 지탱 가능하다. 러시아의 경우 국가 수입의 절반 가량이 원유 수입을 통해 충당되는 구조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지난 24일 "저유가로 인해 올해 러시아 경제에는 1000만달러 가량의 비용이 발생하게 됐으며 이 때문에 러시아 경제 성장률은 0.5%를 넘지 못할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지난 3분기 성장률은 0.7%였다.
러시아 경제가 어려움에 빠지고 있다는 것은 루블화 가치 급락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루블화 가치는 지난해 2월부터 계속 떨어지는 중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이달 초 달러화 매도를 통한 환 방어에 나섰고 기준금리를 8%에서 9.5%로 올리는 등의 극단책까지 썼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달러화 대비 루블화 가치는 지난 3개월 동안에만 22% 이상 내렸고 올들어 하락율은 40%를 넘는다. 물가는 치솟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동기대비 8.3% 상승했다. 2011년 7월 이후 최대폭으로 오른 것이며 러시아 중앙은행의 물가 상승률 목표치 4%의 배를 넘는 것이다.
러시아 대형 기업들도 죽을 맛이다. 국영 원유 생산업체 로즈네프트의 지난 분기 당기 순이익은 전년대비 99% 급감했고 국영 가스 수출업체 가즈프롬은 엄청난 순손실을 기록했다.
블룸버그가 27명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데 따르면 이들은 러시아 경제가 경기후퇴(recession)에 빠질 위험 가능성을 70%로 보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러시아 국가 신용등급을 투기 등급으로 강등할 수 있다고까지 밝혔다.
반면 미국 경제에는 청신호가 켜졌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68.5%가 소비지출이고 석유와 가스 생산에 대한 투자는 1% 미만을 차지할 뿐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유가 하락은 특히 경기 회복의 수혜를 별로 느끼지 못했던 저소득 및 중간소득 계층 미국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유가 하락과 함께 일자리 사정이 나아지면서 임금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 정보 서비스의 에너지 분석부문장인 톰 클로자는 "미국인들은 하루에 약 10억달러 가량의 휘발유를 소비하고 있다"면서 "유가 하락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11~12월 약 84억달러의 소비 절감 효과를 보게 된다"고 분석했다. 또한 전형적인 미국 가구가 연간 1200갤런의 휘발유를 소비한다고 치면 유가 하락으로 인해 가구당 최소 400달러 이상을 아끼게 될 것으로 봤다.
더글러스 오버헬만 캐터필러 최고경영자(CEO)는 "유가가 배럴당 75~95달러에 머물기만 해도 연방준비제도(Fed)보다 더 큰 부양책이 나온 셈"이라고 말했다.
◇ 한국ㆍ인도 등도 유가하락 ‘수혜’
에너지 수입이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도 유가 하락은 반갑다. 원유 사용량의 80%를 수입하는 인도, 최근 성장률 둔화로 고전하고 있는 중국, 경기 침체에 재진입할 것이 우려되는 일본 등이 모두 그렇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 태국 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지속적인 유가 하락으로 인해 소득 증가 효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멜버른 소재 IG마켓츠의 수석 스트래티지스트 크리스 웨스턴도 "유가 하락은 내년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기 전까지 아시아 경제의 체질을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석유 업체들에게 돈을 빌려줬던 은행권에는 부담이 갈 것으로 보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바클레이즈와 웰스파고 등은 사빈 오일&가스와 포레스트 오일의 인수합병(M&A)에 8억5000만달러에 달하는 브릿지론(Bridge Loan)을 제공했는데, 유가 하락으로 이들 회사채가 팔리지 않으면 대출이 부실화될 위험에 처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저금리를 틈타 상당수 에너지 기업들이 대출을 늘려 확장을 꾀해 왔기 때문에 다른 은행들의 부담이 커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FT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