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의 가처분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소비가 위축돼 경기침체가 이어지는 스크루플레이션(screwflation)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가계빚은 늘어나고 있지만 소득은 줄고 장바구니 체감물가까지 오르면서 서민 살림살이가 점점 팍팍해진 탓이다.
9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최근 경기동향’(그린북)에 따르면 11월 소매판매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백화점 매출액은 1년 전보다 5.6%, 할인점 매출액은 3.9% 감소했다. 각각 2.2%, 0.9% 줄어든 전달에 비해 하락폭을 더 키우며 감소세를 이어갔다. 같은 달 신용카드 국내 승인액은 5.3% 늘었지만 10월 7.5% 증가에 비해서는 증가세가 꺾였다. 휘발유 판매량도 전달에는 2.0% 늘었지만 11월에는 0.4% 증가하는 데 그쳤다. 10월 전체 소매판매액도 전달보다 0.4%, 1년전보다 0.3% 줄어든 바 있다.
이처럼 소비가 지지부진한 것은 빚 부담은 가중되고 있는데도 소득은 ‘찔금’ 늘어난 가계 사정과 무관치 않다.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가계가 1년간 번 돈으로 빚을 상환할 수 있는 여력을 보여주는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지난 9월말 현재 역대 최고인 137%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고용노동부와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 3분기 상용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의 1인당 실질임금은 월평균 295만여원으로 1년 전보다 0.08% 늘어나는 데 그쳤다. 지난해 같은 기간(294만8920원)보다 2000원이 채 늘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는 2011년 4분기 이후 2년 9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실질임금 상승률은 지난해 2분기 3.4%를 기록한 이후, 6분기 연속 증가폭이 줄어들고 있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소비가 살아나지 않고 있는 것은 임금상승률도 낮은 데다, 정부의 부동산 부양정책에도 가계부채 이자부담이 커지고 있는 영향이 크다”고 설명했다.
농협경제연구소는 최근 내놓은 주간 보고서를 통해 이 같은 가계부채 증가, 실질임금 감소 등으로 인해 경기가 침체되는 스크루플레이션이 일어날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스크루플레이션(screwflation)은 돌려 조인다는 뜻의 ‘스크루(Screw)’와 물가가 올라가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스크루플레이션은 장바구니 체감물가 상승, 주택가격 하락, 임시직의 증가, 세금 과다 등으로 중산층의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증가해 소비가 위축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경제가 지표상으로는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중산층의 입장에서는 들어오는 돈은 줄어들고 나가야 할 돈은 늘어나기 때문에 소비가 위축되고 실질적 경기는 제대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 소비자물가는 25개월째 1%대 저물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가계가 느끼는 장바구니 체감물가는 계속 오름세다. 최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식품소비행태 조사 결과, 가계의 장바구니 체감 물가지수가 작년과 비교해 14.4%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해마다 급등하는 장바구니 체감물가지수 상승이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57.7%로 전년 대비 9.4% 포인트가 올랐다. 장바구니 체감물가를 반영하는 11월 생활물가지수 증가율도 전년동월대비로는 0.7% 상승했다.
임시직도 늘고 있는 상황이다. 9월까지 석달 연속 20만명이 넘는 증가세를 보여온 임시직은 10월에 14만7000명 늘며 증가폭이 축소됐긴 했지만 여전히 증가세는 계속됐다.
김한종 농협연 책임연구원은 “최근 우리 경제는 가계부채 증가, 실질임금 감소, 계약직 증가, 부동산 문제 등 스크루플레이션이 일어날 잠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면서 “실질임금을 높이려는 노력과 함께 물가 관리에도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