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 신년인터뷰] “올해도 경제 주체들은 모두 인고(忍苦)의 시절을 맞게 될 것”

입력 2015-01-0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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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후반의 성장률 전망치는 좋은 편이나 분배나 노사관계 등에선 부실”

▲최유진 기자 strongman55@

조순(趙淳) 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이내 일종의 난감함이 찾아온다. 전직(前職)은 줄줄이 떠오르는데 지금 당장은 무어라 직함을 붙여야 하나, 하는.

“교수죠, 교수.”

맞다, 현재 20년간 제자를 기르고 학문에 정진했던 서울대 경제학부의 명예교수로 있다.

1988년 이후엔 정부 일을 했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2년 간, 1992년부터는 1년간은 한국은행 총재, 재정과 통화 정책의 콘트롤 타워를 모두 거친, 유례없는 이력이다. 그러다 정계에 입문했다. 민주당에 입당했고 민선 1기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됐다. 대권 도전을 선언하고 후보로도 추대됐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끌던 ‘꼬마민주당’을 신한국당와 M&A시킨 뒤 한나라당의 초대 총재가 됐다. 한나라당이란 당명의 작명가이기도 하다. 2000년 은퇴한 이후엔 다시 학문과 벗 삼고 있다.

많은 이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아마도 이제 구순을 향해가는 조순 교수의 건강이 아닐까.

“아주 좋습니다. 지난해 초에는 심각하게 아파서 이러다가 못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됐습니다만 지금은 다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괜찮아졌습니다.”

관악구 행운동 자택에는 그래서 곳곳에 지팡이가 놓여져 있다. 그러나 누군가 거동을 도와야 할 만큼은 아니다. 매일 몇 종류의 신문을 열독한다. 가장 최근의 이슈를 얘기해도 모르는 것이 없다. 그래도 지난해 초 학술원에서 논문 청탁이 왔을 때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지더라도 책상에서 쓰러지자’는 각오로 매달려 논문을 썼고, 곧 탈고될 예정이다.

제목은 광범위하게 잡았다. 지금까지 몸소 학문과 정책, 정치를 통해 알았던 경제 이야기를 다 풀어놓고 싶어서였다. <자본주의 경제의 지속성장을 위한 경제운영의 원리>. 제2의 <경제학 원론>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제대로 된 경제학 교과서 하나 없던 시절, 조순 교수는 내가 써보자고 마음 먹고 ‘경제학 원론’을 썼다. 보문동 여관방에서 1년 걸려 집필한 이 책은 지난해로 불혹을 맞았다. 그동안 수제자들이 공저자가 되어 도왔다. 책상 옆에는 초판부터 최신 개정판까지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다. 수제자들은 잘 알려져 있듯 정운찬 전 국무총리, 이정우 경북대 교수,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전성인 홍익대 교수 등이다. 제자들에 대해 얘기를 할 때마다 조순 교수는 애정을 숨기지 못한다.

▲최유진 기자 strongman55@
2014년, 참 누구나 힘겹게 버텨왔다. 2015년은 어떻게 맞이하게 될까.

조순 교수의 전망은 장밋빛과는 거리가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이란 단서가 인터뷰 내내 계속 쓰였는데, 그건 당의(糖衣)를 입혀 인기를 구가하기 보다는 본질을 호도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았다. 그는 올해도 각 경제 주체, 정부와 기업, 가계 모두 인고(忍苦)의 시절을 맞게 될 것이라고 본다. 성장률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경제의 이면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나 연구기관에서 제시하는 3%대 후반의 성장률 전망치는 좋은 편이죠. 하지만 이 정도 성장이 되더라도 분배나 노사관계 등을 볼 때 내용 면에선 부실합니다. 무엇보다 1960년대 이후 계속돼 온 성장에 대한 숭앙은 거의 신앙과도 같아서 여기에 너무 매달리다 보니 내용은 계속 채우려는 노력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올해도 가시밭길을 묵묵히 걷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는 얘긴가.

"그러기보다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을 해야하고 이를 위해 인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본이 바로 서야 길이 보이는 것이죠." 근본과 원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원론적’ 이야기이지만 실제 가장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성장을 얘기하고 있다. 부동산 가격의 안정화를 얘기하며 규제를 풀고 또 푼다.

"부동산 가격을 하루아침에 내려버리게 한다면 사회 문제도 커지고 표심도 멀어지죠. 그러니까 그게 두려워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대출, 그린벨트 등에 대한 규제는 대폭 풀었죠. 문제가 커집니다. 부동산이 좀 오르려나 하고 기대해서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 사는 사람들 늘어나면 좋은 게 절대 아닙니다. 가계부채 문제는 이렇게 두면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런 복잡한 상황을 한 번에 빨리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없습니다. 오래 시간을 들이고 노력해서 근본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장 신앙’이 수십 년간 계속됐는데 그걸 어떻게 단박에 바꿉니까.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뜻에서 인고를 얘기했던 겁니다."

조순 교수는 성장신화에 사로잡혔던 과거를 "경제정책이 경제만 생각했던 과오"라고 지적한다. 교육도, 사회도, 분배도 균형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성장만 하겠다는 식의 경제 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낙수효과는 더이상 기대하기 어려우며 정책 책임자, 그리고 정치인들이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자꾸 반복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금 경제팀도 이런 잘못된 ‘성장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경제가 잘 안 돌아간다고 하면 성장률이 낮다는 얘기구나, 라고 생각하고 바로 성장률 올리기에만 급급한 거죠. 성장률을 높이려고 할수록 그동안 성장을 위해 포기해 버린 부분, 교육이나 사회, 균형 등에 대한 부분은 더욱 더 엉크러지고 맙니다.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한다면 결국은 실패할 겁니다."

특히 부동산 가격이 소득대비 매우 높다고 보고 있는 조순 교수는 정부가 생각하는 부동산 안정화가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것이라면 반대한다고 했다. 가격을 높이려고 부추기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지금보다 더 높아져서는 안 된다고 두 번, 세 번 강조했다.

성장의 새로운 활력은 그럼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경제 주체들에게서 나와야겠죠. 그 중에서도 정치 리더십이 중요하고 그 정치 리더십의 한 가운데에는 대통령이 있겠죠. 리더가 비전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전술을 세울 수 있습니다."

임금(소득) 상승이 일단 진행되면서 양극화가 메워지는 성장이 아니라는 면에서 요즘 호황기에 들어서고 있다고 관심을 받는 미국 경제 성장에 대해서도 비판적 자세를 보였다. 서민들에게 다 돌아갈 수 있는 임금이 오른다면 성장률이 높아지는 것을 걱정없이 보겠지만, 군수산업 같은 것이 잘 되어 국내총생산(GDP)을 늘리는 것으로 성장률도 높아지는 건 유의미한 성장이 아니라고 봤다.

기업 규제 완화가 성장의 활력을 가져올 것이란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규제 완화가 대체로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자는 것인데, 그러한 규제 완화는 도움 안 됩니다. 중소기업이 살 수 있게 해줘야죠. 대기업들은 자꾸 비용 줄인다고 해외에 일자리를 만드는 추셉니다. 국내 일자리를 만들 수 있게 강제할 수 있다면 다른 규제를 완화해줄 수는 있겠죠."

이런 소신과 고집스러움은 과거 조순 교수의 입지를 곤란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가정교사 역할 요구를 거절하자, 미움을 사고 결국 도미했다. 재미있는 건 조순 교수가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당시 생도 전두환, 노태우를 직접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그 인연이 후에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겠지만.

한은 총재 시절에는 중앙은행의 독립을 강하게 외치다가 정부에 밀려 물러나기도 했다. 1992년 당시 한은은 아예 정부 산하 ‘남대문 출장소’였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현재는 경제가 위기 상황에 닥쳐 있기도 하고 협력이 더 필요한 시대인 만큼 자신이 당시 강하게 외쳤던 중앙은행의 독립은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운명이 자꾸 나를 끌고 와서 이런 저런 일을 다 해보게 됐는데 어느 하나 후회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심을 다해 일했고 도리를 다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경제기획원 장관과 한은 총재를 너무 짧게 지냈고 나왔던 것이 아쉽습니다. 좀 더 오래 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싶죠. 지속가능한 토대를 만들어놓고 나오기 위해서 말입니다. 제대로 실력을 갖춘 사람이 한 10년은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어야 제대로 된 경제 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필>

서울대 상과대학 전문부 졸업

미 보든대 경제학 학사

보든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미 UC버클리대학원 경제학 박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

민선 1기 서울시장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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