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가 우리 사회에 울림을 줬던 게 딱 1년 전이다. 대학가에 번졌던 이 대자보 시위(?)는 비상식이 사회를 지배할 수도 있다는 우려와 절박감이 표출된 것이었다. 철도노조가 민영화에 반대하며 파업을 하자 4000여명을 단번에 해고해버린 코레일, 부정선거 의혹, 쌍용자동차 노조 이야기 등이 대자보에선 ‘안녕하지 못한’ 상황을 나타내는 사례였다.
1년이 지났지만 상황이 나아졌다기보다는 새로운 우려들이 차곡차곡 더해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하면서 경기는 더 움츠러들었다. 정부의 경제팀이 바뀌어 경기부양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외쳤지만 효과는 ‘반짝’ 나타났을 뿐이었다. 그것도 기대감에 금융시장이 반응한 정도였지 정부와 한국은행이 내다보는 지난해와 올해 경제성장률은 종내는 하향 조정됐고 단기적인 효과를 노렸음이 분명했던 부양책들에 대해선 ‘잘못 썼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여기에 정부가 말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란 말도 해고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얼마 전 한 대학교에는 또 대자보가 내걸렸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경제정책에 F학점을 줬다. ‘오늘날 한국 경제위기의 해결 방법을 쓰시오’라는 문제에 대해 부동산을 통한 내수경기 활성화,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등 경제팀의 정책이 쓰인 답안지에는 낙제점이 매겨졌다.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의 평가도 같았다. 노련한 경제학자인 데다 행정 경험도 풍부하다는 면을 고려하면 오히려 더 수위가 높은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운찬 이사장은 이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현 경제팀이 내놓은 정책은 매우 단기적이다. 정권의 유지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는지 모르겠지만 부동산 시장을 띄우려 한다든지, 돈을 푼다든지(재정 및 통화 정책의 완화) 하는 정책은 성장으로 전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소득주도의 성장을 얘기하고 있지만 결과에 대해 낙관할 수 없다고 했다. 최 부총리가 노린 건 서민들의 소비를 늘려 내수 경기가 살아나면 기업의 이윤이 늘고 그것이 생산과 투자로 이어져 경제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이른바 분수효과(trickle-up effect)를 내는 것인데, 이론은 좋지만 현실이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이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은 임금을 올리려 하지 않는 데다 만약 최저임금 등을 통해 억지로 임금소득을 늘린다고 해도 소비가 살아날 구조가 아닙니다. 부자들은 이미 쓸 만큼 쓰고 있고 서민들은 가계부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경제팀의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 성공하길 바라지만 지금까지로 봐서는 성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소득주도 성장 정책도 아니라면 대체 해결책은 있는 것일까. 정운찬 이사장은 기업이 투자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누가 얻으면 누가 잃는 제로섬이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파이를 키워 이익을 나누는 동반성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투자를 늘리라고 하면 “규제가 너무 많다”고 반발한다. 정운찬 이사장은 이 의견도 단박에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규제는 풀 만큼 풀었습니다. 필요한 규제까지 풀면 곤란하죠. 대기업들은 솔직히 투자할 만한 대상이 없는 겁니다. 일자리를 늘리고 임금을 올려주는 데 돈을 쓰면 좋겠지만 그건 이상적인 얘기입니다. 임금은 한 번 올리면 내려오지 않는 비탄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업들이 쉽게 올리려 하지 않거든요. 바로 케인스 일반이론 제1장에 나오는 얘깁니다."
이런 노력들이 쌓일 때 덩치만 먼저 커지고 속이 채워지지 않은 우리 경제가 튼실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반성장위원회를 이끌면서 올린 성과는 동반성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기틀을 만든 것이라고 자평했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새로운 아이디어는 첫째 단계에선 조롱당하고 둘째 단계에선 거세게 비판받지만 셋째 단계까지 가면 인정을 받게 된다”면서 “대기업들도 노력은 하고 있지만 과연 그 노력에 진정성이 있는가, 계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동에 나서는 면이 부족하다”고 했다.
특히 동반성장위원장 시절부터 줄곧 주장해 온 중소기업적합업종의 법제화, 대기업 초과이익 공유제 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지 못했다는 점을 매우 아쉬워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은 수출을 돕는 쪽에 방점을 두어 왔고 그러면서 대기업들이 많은 혜택과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수출 단가를 내려서 경쟁력을 키우려고 협력업체들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했죠. 그런데 이제 수출로 많은 이득을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협력업체도 그 과실을 나눠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할 텐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이 과실, 그러니까 초과이익을 일부라도 중소기업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중소기업이 기술도 개발하고 해외에도 진출하고 일자리도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전히 대기업들은 갑(甲)입니다. 납품가 후려치기 관행이 횡행하고, 현금 대신 어음을 주고, 심지어 주문할 때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통보를 하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죠. 대기업들의 전향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중소기업적합업종을 두고 최근엔 이렇게 중소기업에 칸막이를 쳐서 보호하는 것이 경쟁력을 키우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정 이사장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적합업종 선정을 위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처음으로 한테이블에 앉아 논의해봤습니다. 2011년에 80여개를 만들었죠. 그런데 대기업들의 전방위 공격으로 거의 적합업종이 해제됐습니다. 합의를 통해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긴 합니다만 아직까지는 중소기업들의 자생력이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강제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걸 위해 법제화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냥 놔뒀다가는 지금처럼 대기업이 시장을 다 먹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시장 경쟁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이 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행정부에 있진 않지만 동반성장 등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혹은 사석에서라도 정부 관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느냐고 했더니 “저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던데요”라고 했다. 우회적으로 현 정부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한 것으로 봐도 되겠다.
지난 대선을 뜨겁게 달궜던 경제민주화에 대한 논의가 쏙 들어간 것에 대해서도 많은 안타까움을 보였다.
“더 이상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건 그만큼 경제민주화에 대한 철학이 모두 부족했다는 반증이겠죠. 의지도 강해야 하고 현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다 부족했던 거죠. 그러다 보니 경제민주화는 내팽개쳐진 보릿자루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선거 때가 되면 아마 또 나올 겁니다. 여야 모두 좌판에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호객 행위를 하겠죠. 그렇지만 경제민주화는 좌판에서 팔 물건이 아니라 제대로 한 번 해봐야 하는 겁니다.”
재벌개혁 같은 문제도 사실 그렇지 않느냐고 물었다. 거의 모든 대통령들이 이건 내가 한 번 해보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고…. 정운찬 이사장도 인정했다. 하지만 최근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재벌 총수, 오너 일가에 대한 가석방 논란에 대해서는 조금은 너그러운 입장이었다. “재벌 총수가 죄를 지었다면 형을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법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에게나 모두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자라고 더 중하게 범법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재벌 총수가 감옥에서 나와야만 경제에 활력이 생긴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 나오는 게 좋지 않겠느냐 생각하는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2015년 경제에 대해서도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다.
“단기적인 부양책을 다 접으라고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부동산 시장을 띄우고 금리 내리고 하는 식의 전술은 한계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근본적이고 멀리 내다보는 성장 전략을 짜야 합니다. 연구개발(R&D) 중에서도 연구에 비중을 더 늘리고 창의성을 키울 수 있게 교육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것이 함께 가야죠. 그래야 우리 경제가 덩치에 걸맞게 지속가능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정운찬 프로필>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미 마이애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미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총장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현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