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거룩해지는 건 거북해요

입력 2015-01-0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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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설계연구원장

을미년 새해다. 기도로 글을 시작한다. 다음 글을 인용하고 싶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양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거룩하시도다/찬양문). “거룩하신 주님, 제가 가는 곳마다 당신의 향기를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저를 도우소서”로 시작되는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기도도 생각난다.

거룩하다는 게 뭘까? 거룩한 새해라는 말은 혹시 가능할까? 거룩하다는 말은 성당이나 교회, 위인전에서 주로 만날 수 있을 뿐 일상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위대하고 뜻이 매우 높다는 의미이니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훌륭하다, 존엄하다, 고귀하다, 소중하다 등의 말과 통하는 단어라는데 성인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나?

나는 거룩하다는 말을 초등학교 때 배운 ‘한글날 노래’에서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강산도 빼어났다/배달의 나라/긴 역사 오랜 전통 지켜온 겨레/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이게 1절이다. 세종대왕도 거룩하시고 이순신 장군도 거룩하시다.

성탄절 무렵 많이 듣게 되는 크리스마스 캐럴에도 ‘거룩’이 나온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는 캐럴일 것이다. 1818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그루버가 작곡한 노래이니 200년이 다 돼 가는 명곡이다. 독일어로 heilig, 영어로 holy가 바로 ‘거룩한’인데, 이걸 성스러운, 신성한으로 번역하면 어색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젊어서 이 노래를 멋대로 바꿔 불렀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신랑신부 첫날밤’. 그 다음은 여기에 쓰기 좀 거시기하니 생략하고, 맨 마지막 ‘아기 잘도 잔다’ 이 부분은 ‘아이 간지러워’ 이렇게 바꿔 불렀다는 말만 하겠다. 신랑신부 첫날밤이 거룩한 밤일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고요한 밤은 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거룩하다는 단어를 가지고 말장난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1주일 전 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에 갔더니 맨 뒤편의 의자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앞자리부터 앉으시면 더 거룩해지십니다.’ 신자들이 뒷자리에만 앉고 앞으로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써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앞자리에 앉으면 정말 거룩해질까? 성당이나 교회에 가는 것은 거룩해지기 위해서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하다’는 깨끗하다는 의미이고, 깨끗하다는 것은 악을 향한 마음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순진하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린이는 거룩한 것인가? 마태복음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나?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어떤 사회명사가 문화예술을 적극 후원한 공로로 국제적인 큰 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밝힐 때 “앞으로 내가 거룩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단박에 그가 좋아졌다. 나도 결단코 거룩해지고 싶지 않다(물론 그런 일도 없겠지만). 거룩한 건 나한테는 아주아주 거북한 일이다. 결코 거룩해지지 말자고 굳세고 모질게 새해 결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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