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3일, 20일, 27일은 상장사 10곳 중 8곳의 주주총회가 열리는 날이다. 매년 3월 금요일은 일명 ‘주총데이’다.
상장회사의 정기 주주총회 몰림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기업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정을 몰아붙이며 주총장을 임직원 등 거수기들로 채웠다. 한 기업의 의사를 결정하는 주총이 소액주주들의 의결권을 봉쇄하는 형식적인 의례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도 역시 3월 슈퍼 주총데이 = 올해 12월 결산 상장사들의 정기 주주총회도 어김없이 ‘3월 금요일’에 몰려 열린다. 다수의 상장사 정기 주주총회가 몰린 날인 ‘슈퍼 주총데이’는 주주들의 참여와 주주권 행사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지적돼 왔다. 기업들은 그러나 올해도 귀를 닫았다.
3일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12월 결산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가운데 3월 둘째~넷째주 금요일에 주주총회를 연 곳은 2011년 80%, 2012년 80%, 2013년 81%, 지난해 84%로 매년 80%를 넘었다.
특히 지난해 3월 21일에는 무려 662개의 상장사들이 한꺼번에 주총을 열었다. 올해에도 지난달 27일까지 주총 일정을 공시한 유가증권 상장사 369개 가운데 322개(87%)가 오는 13일과 20일, 27일에 주주총회을 개최한다.
13일에는 삼성 계열사들이 한꺼번에 주주총회를 연다. 삼성전자와 삼성SDI, 삼성물산, 삼성중공업, 삼성화재, 삼성생명, 삼성증권, 삼성카드, 에스원 등 삼성 계열사들이 13일 오전 9시에 주주총회를 개최한다. 두 곳 이상의 삼성 계열사 주식을 보유한 주주가 주주총회에 참여하려면 한 곳만 선택해야 한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등 현대차그룹의 주주총회도 13일 열린다.
20일과 27일에도 주요 상장사들의 주주총회가 대거 몰려 있다. 네이버와 현대글로비스, 녹십자, LS산전, 만도, 농심, 한라 등이 20일에, NHN엔터테인먼트, LS, 엔씨소프트 등은 27일 주주총회를 연다. 특히 넥슨과 치열한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엔씨소프트의 이날 주주총회는 많은 투자자의 시선을 끌 것으로 관측된다.
문제는 주총 대부분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열리는 데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탓에 소액주주들은 몸이 열 개라도 참여가 어렵다는 점이다.
지난해 역시 삼성과 포스코, 현대중공업, 한진, 한화, CJ 등 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같은 날 주주총회를 개최했다. 현대차와 LG, 롯데 등의 그룹은 70%가 넘는 계열사가 한날 주주총회를 열었다. 특히 평균 30분 안팎의 속전속결을 자랑했다. 삼성전자의 주총은 45분 만에 끝났으며 현대차는 25분, LG전자는 20분 만에 주총이 종료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너 일가의 등기이사 선임과 이사보수 한도 조정 등 민감한 이슈들도 큰 이변 없이 통과됐다. 삼성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등기이사로 재선임됐고, 현대차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정의선 현대모비스 부회장, LG는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등이 재선임됐다.
이들 모두가 주총에 참여한 것도 아니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 부자가 나란히 불참했다. 특히 LG의 경우 구본준 부회장은 LG전자의 대표이사에 임명된 2011년부터 주총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 오히려 삼성의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주총에서 의장으로 참석하는 데 대해 ‘놀랍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기회 뺏긴 소액주주들 = 이런 몰아치기 주주총회는 소액주주의 참여를 제한한다는 지적에도 점차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다. 서스틴베스트 관계자는 “주주총회가 한날 몰리면 주주들이 각사의 주주총회 참석이 어려워진다”며 “주주총회를 같은 날 개최하는 관행은 안건 등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싶어하는 기업들의 편의주의”라고 꼬집었다.
시간도 오전 9~10시에 집중돼 있어 기관투자가가 아니고서는 같은 날 주총을 개최하는 여러 기업들의 주식을 보유한 소액주주들은 주총 참석이 어려워졌다. 주총이 몰리면 주주들의 실질적인 참여율을 떨어뜨려 형식적인 주총에 그칠 수밖에 없다.
주요 대기업 주총장에 온 주주들은 대부분 해당기업 재직자거나 기관투자가들로 짧은 시간 내 거수기 역할만 하고 사라지는 모습이다. 게다가 재직자들은 건물 내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잠시 주총장에 얼굴을 내밀고 자리를 채웠다가 돌아가는 양상이 뚜렷했다. 상장사들이 일부러 소액주주의 참여 자체가 어렵도록 일정을 짜고는 임직원으로 빈 자리를 대체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는 기관투자가들도 마찬가지다. 현재 대다수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투자 대상에 대해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국민연금이 새로운 의결권 행사 지침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의결권을 행사하는 기관투자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 이런 한날한시 주주총회는 안건에 대한 부실한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스틴베스트에 따르면 작년 시가총액 상위 600개 기업의 5667개 안건 중 5개 안건만 부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대만은 하루에 주주총회를 열 수 있는 기업 수를 정했다. 이지수 서스틴베스트 전무는 “슈퍼 주총데이에 주주총회가 몰리면 소액주주뿐 아니라 기관투자가 역시 안건에 대해 의견을 밝히기 어렵다"며 “대만 등 해외 사례 등을 참고해 제도적으로 주주총회 날을 분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슈퍼주총데이가 생겨난 이유에는 사업보고서 제출기한 규정 탓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자본시장법은 상장회사의 사업보고서 제출 기한을 사업연도 종료 이후 90일 이내로 규정하고 있다. 사업보고서에는 배당금이 기재돼 있어야 하는데 배당금액은 주총에서 승인을 받아 결정된다.
12월 결산법인의 경우 3월 말까지 결산부터 외부감사, 주총 소집 및 개최를 숨가쁘게 진행해야 한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이 같은 경우를 고려하더라도 금요일에 일제히 열리는 이유는 주총 의결을 쉽게하기 위한 관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송영록 기자 sy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