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어요.” 영화학자 리 봅커가 ‘위대한 배우는 캐릭터의 내적 확신과 지식을 스크린과 TV 화면의 장벽을 가로질러 관객과 시청자 각자의 의식 속으로 직접 도달하게 하는 배우다’라고 주장한 최적의 사례로 꼽히는 뛰어난 연기력의 배우 나문희가 인터뷰 때 한 말이다. “YB는 윤도현이 아니고 윤도현 밴드입니다. 저보다 밴드의 연주에 더 귀 기울였으면 합니다.” 윤도현이 기자들에게 자주 하는 당부다.
최근 출간된 데이비드 즈와이그의 ‘인비저블(Invisibles·보이지 않는 이들)’이 두 사람의 언급을 소환시켰다. 음반 제작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즈와이그는 ‘인비저블’을 통해 외부적 찬사나 보상에 별 관심은 없으나 자신의 직업 영역에서 고도의 전문성으로 막중한 책임을 지며 일을 통해 깊은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 에릭 클랩튼 등 전설적인 스타들의 음악을 담당한 녹음기사 앤디 존스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에게 돈과 인기 그리고 명성까지 보장된 롤링 스톤스의 베이스 주자가 되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당신한테는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거로 보일지 모르지만…”이라는 말을 하며 제안을 거절한다. 앤디 존스 같은 녹음기사에서부터 기자가 작성한 기사의 잘못된 사실이 없는지를 검증하는 검증 전문가(Fact Checker), 마취과 전문의, 공항 표지판 디자이너, 초고층빌딩의 구조공학자까지 남들이 잘 모르고 인정하지 않아도 묵묵히 커튼 뒤에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 사회에선 수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일만 하려는 이들이 많다. 남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평가하지 않으면 보상도 뒤따르지 않는다. 스태프는 생계 위협을 받지만, 스타는 막대한 출연료를 비롯한 작품의 과실을 독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 인터넷과 SNS의 보편화로 인해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투쟁이 본격화하고 자기홍보와 노출이 일상화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수많은 연기자와 배우 지망생은 대부분 드라마나 영화의 배역 비중이 크고 대중으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주연만을 생각한다. 대중 역시 스타와 주요 연기자에 주목할 뿐 드라마나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치열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노력하는 세트 디자이너, 분장사, 조명기사, 촬영기사에 대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이병헌 장동건 손예진 김태희 등 주연만 있어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주연을 떠받치는 조연과 단역 연기자부터 촬영기사를 포함한 수많은 스태프의 존재가 없다면 드라마나 영화는 완성될 수 없다. 음향과 녹음기사, 무대를 설치하는 노동자들이 없다면 조용필 이승철 이문세 같은 레전드의 노래는 무대를 통해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
국가와 사회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관심을 받고 영향력이 큰 정치인, 기업가도 필요하지만, 이들만 있어서는 결코 국가와 사회가 지탱될 수 없다. 청소부에서부터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남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국가와 사회가 존립할 수 있다.
나문희는 “작은 배역이라도 진정성 있는 뛰어난 연기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면 작은 배우가 아닌 위대한 배우다”라고 강조한다. 윤도현은 “저의 노래보다 밴드 멤버들의 연주가 훨씬 훌륭합니다. 밴드의 연주가 없으면 제 노래는 대중에게 관심을 받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저보다 밴드 멤버들에게 박수를 보내주세요”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제 나문희와 윤도현 말처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지 말자. 동시에 ‘인비저블’의 저자 데이비드 즈와이그가 강조한 것처럼 남의 관심을 갈구하며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보다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과 충족감을 준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보자. 그럼 개인의 삶이 좀 더 행복하고 사회와 국가가 조금은 진화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