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울 명동 오전 6시. 큰 도로변에는 몇몇 차량만 지나갈 뿐 사람들의 발길은 닿질 않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 차량이 줄지어 가는 얕은 오르막길이 시선을 끈다. 깔끔한 보브커트에 단아한 H라인 스커트, 멋스러운 재킷을 더해 세련미를 풍기는 여성들이 예사롭지 않은 아우라를 뽐내며 내려 건물 안에 들어선다.
이들이 모인 곳은 은행연합회관 16층 뱅커스클럽. 금융계를 이끄는 여성리더들이 제1회 여성금융포럼에 참석하고자 이른 아침부터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금융계 대모로 불리는 김상경 여성금융네트워크(이하 여금넷) 회장이다. 오는 회원들마다 손을 맞잡고 교감하며 안부를 건넨다. 웃음꽃이 피어나고 삼삼오오 인사하며 관계를 맺어 나간다.
1회 강연자는 하영구 은행연합회장. 여성 인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으면 경기침체를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하며 금융권에도 여전한 유리천장(glass ceiling)을 지적했다. 보수적인 집단으로 꼽히는 금융권에는 유리천장이 더 강력하고 두터웠다. 지난해 권선주 기업은행장이 금융권 첫 여성 행장으로 선임되고 여성 부행장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유리천장이 깨지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아직 여성 고위 임원 비율은 현저히 낮다.
강연에서 하 회장이 더 우려한 것은 “유리천장 너머에는 유리절벽(Glass cliff)이 있다”는 것이었다. 여성이 유리천장을 깨고 리더 자리를 꿰찼더래도 그 자리는 총알받이일 수 있다는 것. 실패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가 있으면 일부러 여성에게 이를 맡기고,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유리절벽이다. 유리천장처럼 성 차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같은 직장 내 성차별은 우리 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여전하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6일(현지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유리천장지수’를 발표했는데, 한국은 25.6점(100점 만점)으로 꼴찌에 등극(?)했다. 한국 여성과 남성의 임금격차는 36.6%에 달하고, 여성의 고위관리직 비율은 11%였다. OECD 평균(임금격차 15.5%, 여성 고위관리직 비율 30.6%)에 비해 ‘참단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수치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도 여성임원의무할당제를 도입해야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노르웨이는 2003년 최소 40%를 목포로 여성임원의무할당제를 도입했고, 결과 직장 내 여성고위직 비율이 30%(2014년 기준)를 넘어섰다. 이후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 여러국가도 제도화를 했다. 최근 독일도 여성 임원 할당제 도입할 것을 알리며 관련 법안을 추진 중이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해 여성장관들이 막강한 우먼파워를 과시했고, 연방정부가 적극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 그래서 여금넷이 ‘30% 여성금융인 만들기’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은 남달리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인력 활용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견고한 유리천장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그 다음에 기다리는 것이 아찔한 유리절벽일지라도. 전 세계적 사회 분위기 속에 여성임원은 점차 늘어 날 것이고,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로 삼아 위기 대처 능력을 키우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