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총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주총에 막상 참석하니 기존의 딱딱한 주총이 아니라 소통할 수 있고 선물도 받을 수 있는, 생각보다 재밌는 주총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20일 열린 한화투자증권의 주총에 참석한 주주가 전한 말이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다’라는 말이 도외시되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그동안 국내 기업의 주주총회는 대부분 요식적으로 운영돼 왔다. 혹여 시장의 주목을 받는 주총이 있더라도 주총 의사진행을 막고 그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거나 주총을 일사천리로 끝내기 위해 동원된 ‘주총꾼’들이 장악해 버리기 일쑤였다.
이제는 일부 회사를 중심으로 이러한 관행을 과감히 탈피하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기업들이 일반 주주들과의 소통을 중요시 하는 인식 전환과 함께 전자위임장·전자투표의 본격 도입으로 주주 친화적인 주총이 하나둘 개최되고 있다.
◇주총장이 변했다… 토크쇼부터 선물 증정까지 = “사장님, 눈빛이 살아있습니다.” 아나운서가 진지하게 경영 전략에 대해 설명하는 사장에게 농을 던졌다. 사장은 이 말을 듣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은 사내 행사에 초청된 아나운서가 임직원들 앞에서 농담을 한 것이 아니다.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사장이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에서 열린 주총에서 주주에게 답변하는 모습을 본 김범수 아나운서가 이 같은 이야기를 건넨 것이다.
주총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주총이 기존의 딱딱했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아나운서가 직접 경영진과 토크쇼를 진행하거나 주주를 대상으로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주주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주총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날 한화투자증권은 주총을 2부로 진행했다. 1부에서는 의결 안건에 대한 승인이 이뤄졌다. 이후 열린 2부는 김범수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주총 토크쇼가 펼쳐졌다. 주주들은 1시간 45분가량 올해 경영 방침 및 목표, 주가 전망 등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한화투자증권은 모든 순서가 끝난 뒤에는 주총에 적극 참여한 주주 3명을 추첨해 주 사장이 직접 와인을 선물하는 시간도 가졌다.
풀무원에서는 주총에서 퀴즈쇼가 진행되고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 마련되는 등 진풍경이 펼쳐졌다.
풀무원은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열린 주총’을 개최했다. 이번 주총은 ‘건강한 길을 가다(Green Step)’라는 콘셉트 아래 ‘풀무원, 건강하게 이루다’(국내외 사업성과), ‘풀무원, 세상과 함께 살다’(환경성과·공유가치창출(CSV)), ‘풀무원, 퀴즈로 즐기다’(퀴즈 이벤트), ‘풀무원, 주주 가치를 높이다’(열린 대화) 등 4가지 섹션으로 진행됐다.
특히 제3자 토크쇼 형식의 ‘열린 토론회’는 방송인 이익선씨가 사회를 맡아 풀무원의 경영·사업 현황과 비전에 대해 임원들과 주주들의 대화를 이끌어 갔다.
퀴즈 이벤트 섹션에서는 풀무원 제품과 사업을 주제로 퀴즈를 내는 시간을 가져 정답을 맞힌 주주에게는 풀무원 제품을 선물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또 주주들은 회사 측이 제공한 저칼로리 도시락으로 식사하는 시간도 가졌다.
삼성전자는 주주와 경영진의 티타임 시간을 마련했다.
지난 13일 서울 삼성 서초사옥 다목적홀에서 열린 주총에 참석한 권오현 부회장, 윤부근 CE(소비자가전)부문 사장, 신종균 IM(IT·모바일)부문 사장, 이상훈 경영지원실장 사장 등 경영진은 주총 현장에 바로 참석하는 대신 다과가 준비된 복도로 향했다. 임원진은 딱딱한 주총 장소 대신 이곳에서 주주들과 만나 손을 맞잡으며 삼성전자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주주들이 주총 현장을 제외하고는 경영진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적다는 점에서 이번 티타임은 파격적인 시도로 여겨졌다.
삼성전자는 주주총회에서도 주주와 소통하려는 듯한 자리 배치를 선보였다. 작년까지 의장이 앞에 나서고 이사진이 후면에 앉아 있던 것이 의장을 중심으로 사내외 이사진이 나란히 앉아 주주들과 직접 마주했다.
또 삼성전자는 주총 안건 상정 전에 약 30분 동안 ‘미니 IR’(기업설명회)을 열고 소액주주들의 질문을 받기도 했다.
◇주주 없었던 ‘주총’ … 이제는 참여 유도 = 본래 주총은 ‘팥 없는 찐빵’에 비유할 정도로 주주의 참여가 적었다. 기업들이 주총 상정 의안에 대한 승인 여부를 사측 혹은 대주주의 의견대로 관철시키기 위해 소액주주들의 주총 참여를 꺼려한 탓이다. 또 주총이 주주들이 접근하기 힘든 시간과 장소에서 개최돼 일부 주주를 제외하고는 의결권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최근 기업들이 주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 주총 홍보를 적극 시행하고 있다. 전화나 우편 등을 통해 주주들의 주총 참석을 유도하고 참석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전자위임장과 전자투표를 통해 의결권 행사를 촉구하고 있다. 전자투표제는 주주가 직접 주주총회 회의장에 출석하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최근 주총에 참석한 A상장사의 한 주주는 이러한 주총의 변화에 대해 “파격적으로 소통의 기회를 준 점이 고맙다”며 “참석하지 못할 시 전자위임장이나 전자투표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하라고 하는 것을 보고 주총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주총의 변신은 CEO들의 인식 전환에 기반한다. 주주의 이익이 기반되지 않는 주식회사는 미래 성장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점차 CEO들에게 확대되며 주주 중심의 경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사장은 주총에서 “우리나라 회사는 상장을 했지만 주주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 없다”며 “주총을 하다 보면 회사는 회사대로 (주주의 참여 없이 주총을) 넘어가려고 했고, 주주들도 그러려니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주 사장은 “그러나 주주는 회사측에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주총”이라며 “이번 주총에서 전자투표제를 도입해서 주주 참여 기회를 넓히고, 주주가 회사측에 질문을 할 권리를 되도록 최대한 보장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