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봄날은 간다

입력 2015-05-22 10:35 수정 2015-05-26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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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점심식사 자리에서 선물로 받은 CD에는 오십 개의 ‘봄날은 간다’가 담겨 있다. 1953년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른 백설희부터 배호, 한영애, 심수봉, 조용필, 장사익, 개그맨 김보화에 이르기까지 누구 것을 들어도 다 몸에 감겨든다. 부른 이마다 장르, 음색, 리듬이 달라 같은 노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노랫말이 가슴으로 절절하게 스며들 뿐이다. 희대(稀代)의 절창이다. 같은 CD를 선물받은 대선배께선 스산한 목소리로 신들린 듯 주절대는 한영애의 창법이 최고라고 한다. 감정을 추스르지 않고 절규하듯 토해낸 장사익의 노래 역시 봄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한다.

화가였던 작사가 손로원(1911~1973)은 시(詩)보다 아름다운 노랫말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젊은 시절 사랑에 대한 정한(情恨)의 표출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수줍게 웃던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쓴 노랫말이다. 아들이 장가가는 날 입겠다며 고이 모셔둔 그 예쁜 옷을 어머니는 다시 입어 보지 못한 채 세상과 이별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1절도 절절하지만 2절, 3절이 더 서럽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2절)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3절)

정감 어린 표현들 때문에 가사가 금방 외워진다. 연분홍 치마와 봄바람, 산제비와 성황당길, 새파란 풀잎과 꽃편지, 청노새와 역마차길, 열아홉 시절과 황혼, 뜬구름과 신작로 길…. 아름다운 봄날에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어 느끼는 절절한 감정을 참으로 잘 표현했다. 그런데 중간중간 뜻을 모르는 단어가 감정몰입에 방해가 된다면 이번 기회에 알아두는 것도 좋겠다. 먼저 2절에 나오는 청(靑)노새는 푸른빛을 띠는 노새로, 붙여 써야 한다. 노새는 말과의 포유류로 암말과 수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다. 말보다 약간 작으며, 머리 모양과 귀ㆍ꼬리ㆍ울음소리는 나귀를 닮았다. 몸이 튼튼하고 힘이 세어 무거운 짐을 나를 수 있으나 생식 능력이 없다. 2절 마지막 부분 ‘실없는 그 기약에’의 ‘실없는’은 말이나 하는 짓이 실답지 못하다란 의미의 형용사로 기본형은 ‘실없다’이다. 싱겁다와 같은 뜻으로 실없는 소리, 실없는 사람 등으로 활용된다. 3절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의 ‘앙가슴’은 두 젖 사이의 가운데를 의미한다. ‘앙가슴’의 의미로 ‘안가슴’을 쓰는 이가 있는데 ‘앙가슴’만이 표준어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부분이 가슴에 너무도 깊이 박힌다. 황혼이 아직도 먼 중년이건만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하던 열아홉 시절이 몹시도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봄은 참 얄밉게도 빨리 흘러간다. 올봄도 벌써 저만치 가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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