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한순간에 눈을 잃는다든가 해서 빛의 존재를 잊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순식간에 모든 형태에 화해가 성립된다. 삼각 빵도, 둥근 빵도 요컨대 ‘빵은 빵이다’라는 것을 만인이 납득한다.” 화상으로 인해 인간과 사회로부터 단절된 한 남자의 삶을 통해 소외의 문제를 드러낸 아베 고보의 소설 ‘타인의 얼굴’의 한 구절이 다가온다. 또한,스페인의 폭정에 대항해 멕시코의 독립을 위해 대항하며 맹활약하는 복면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 ‘쾌걸 조로’의 한 장면도 스친다.
요즘 화제의 중심에 복면(腹面)이 있기 때문이다. 인기 높은 TV 프로그램의 소재가 복면이다. MBC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과 KBS 드라마 ‘복면검사’ 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복면(mask)은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헝겊 따위로 얼굴을 싸서 가리는 것이나 물건을 뜻한다. 두 프로그램에서 복면의 역할과 기능은 정반대다. 하지만 사람들은 환호한다. 대중의 열광은 역설적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2015년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사회다.
‘복면가왕’은 인기, 소속사, 외모 등으로 유발되는 선입견과 편견, 왜곡된 시선 등을 배제하고 오롯이 가수의 본질인 가창력만을 평가하기 위해 복면을 쓴 경연자의 대결을 통해 우승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반면 ‘복면검사’는 법을 지배하고 권력을 쥔 자가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는 데에도 법과 공권력 그리고 제도가 해결하지 못해 복면을 쓴 검사가 악을 응징하는 내용의 드라마다.
‘복면가왕’의 복면이 세상과 사람들의 편견과 왜곡의 시선을 차단하고 본질에 이르게 하는 상징적 장치라면, ‘복면검사’의 복면은 법과 공권력,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 권력과 금력을 쥔 자들의 악행과 사회의 부조리를 척결하는 상징적 도구다. ‘복면가왕’의 민철기PD는 “복면을 출연자에 대한 다양한 편견을 배제하고 노래실력만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장치다”고 설명했고 ‘복면검사’의 전산PD는 “드라마에서 현실의 악행을 법과 제도로 해결하지 못해 명쾌하게 응징할 수 있는 도구로 복면을 등장시켰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두 개의 복면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자 불편한 현실인지 모른다. 학벌, 지역, 혈연, 외모, 권력, 지위, 성별, 그리고 자본으로 서열화된 척도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일상화된 지 오래다. 외모와 학벌이 실력을 압도하고 자본이 인간성을 무력화시킨 지 오래됐다. 학벌에서부터 자본까지 다양한 요소로 촉발된 편견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우리의 인식과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한다. 이 때문에 실력이 출중한데도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류전형에 떨어지고 업무능력이 뛰어나도 권력층의 인맥이 없다는 이유로 인사에서 밀려나는 일이 다반사다. 사회와 현실을 압도하는 편견과 왜곡된 시선의 범람으로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다. 이 때문에 복면을 써 출연자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배제한 채 가창력이라는 본질적인 부분만을 놓고 평가하려는 ‘복면가왕’을 보고 열광하는 것이다. ‘복면가왕’에 대한 환호를 통해 학벌과 권력, 자본 등으로 구축된 편견과 왜곡된 인식이 심각하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그 편견에 지배되는 현실의 문제 개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출한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은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고도 당당하게 생활하는 권력층, 조그마한 불법에도 엄격한 처벌을 받는 서민들, ‘유력무죄 무력유죄(有力無罪 無力有罪)’의 사회다. 돈 있으면 죄를 짓고도 무죄가 되고 돈 없으면 유죄가 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외침이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의 입에서 나온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심해졌다. 오죽했으면 국민의 80%가량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동의한다(법률소비자연대 조사)고 대답했을까. 법과 제도는 권력과 자본을 쥔 자 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법과 공권력은 권력층과 불의와 불법, 비리, 부패에 무용지물이라는 생각마저 갖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복면검사’에서 복면을 쓴 검사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행태로 더 큰 악을 응징하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복면검사’에 대한 열광 역시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바로 불법과 비리로 얼룩졌지만, 법과 공권력이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의 불편한 민낯을 보여주는 한편 정의와 양심, 진실이 힘을 발휘하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간절함이 바로 그것이다. 복면을 써야 잘 돌아가는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눈이 멀어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고 쾌걸 조로를 갈망하는 사회는 절망이다. 복면을 쓰지 않고도 편견 없이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정당한 절차와 제도에 의해 문제가 해결되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