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영원한 챔피언 홍수환(洪秀煥·66)이 말하는 ‘엄마’ 황농선

입력 2015-06-0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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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랑 덩어리지"

▲홍수환 체육관에 걸려 있는 ‘엄마, 大恨國民萬世多(대한국민만세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액자는 이성근 화백이 홍수환(66)씨를 위해 직접 써서 선물한 것이다. 특히,‘대한(大韓)’ 대신 ‘대한(大恨)’이라고 쓴 이유는 큰 한을 품었던 우리 국민들이 다 같이 만세를 불렀다는 의미다.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엄마,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2015년 홍수환이 어머니 황농선씨를 기억하며 부르는 호칭은 40여년 전 그대로 ‘엄마’다. 왜 어머니가 아닌 엄마라는 호칭을 쓰냐는 질문에 “그냥 엄마는 엄마가 좋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그의 마음속에 아직까지 어머니는 따뜻하고 인자한 그런 ‘엄마’로 남아 있는 게 분명하다.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라고 외쳤지만,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故황농선씨. 챔피언 홍수환의 ‘엄마’. 홍수환의 어머니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챔피언이 된 후 엄마를 찾은 것일까? <편집자 주>

아버지는 심장마비였다.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았다. 1964년, 그 해 소년 홍수환의 나이 15세. ‘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모자가 겨우 익숙해질만 할 즈음이었다. 홍수환 7남매는 아버지의 부재(不在)에 대한 준비를 하나도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그 슬픔과 맞서고 있었다.

7남매는 어머니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한다. 여인은 함께 슬퍼할 새도 없이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평생 집안 일밖에 할 줄 몰랐던 그녀에게 딸린 7남매를 홀로 키워야 하는 일, 지병을 앓고 계신 시어머니에게 이 비보(悲報)를 전하는 일을 생각하니 현실이 너무나도 참혹한 것이었다.

꽤 넉넉한 집안의 안주인이자 홍수환 7남매의 어머니였던 황농선씨.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녀의 미래를 180도로 바꿔놓았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는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7남매를 짊어져야 하는 미망인(未亡人)이 됐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홍수환은 그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 자체로 사랑 덩어리였지. 자식이라면 사족을 못 썼으니까. 자식들이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해주셨어요. 큰형이 독일제 ‘KUBA’라는 전축을 갖고 싶어 했는데, 그것을 어디서 구해오셨죠. 우리나라에 당시 부통령이랑 우리 집 단 두 대밖에 없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어요.”

▲샌드백을 치고 있는 홍수환.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 자식 못 이기는 엄마

1974년 7월, 홍수환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왔다. 빛나는 챔피언 벨트를 가지고 귀국한 홍수환에게 온 국민이 환호했다. 공항은 취재 인파로 북적였고, 국가는 카퍼레이드로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했다.

그러나 그 환호성 뒤에서 어머니 황씨는 웃을 수만은 없었다. 멍이 가실 날 없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챔피언의 영광은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홍씨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뚫고 달려가 아들에게 묻는다. 챔피언인지 뭔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수환아, 다친 데는 없니?”

아들이 자랑스러워 웃고 있는 챔피언의 어머니, 그 찰나의 미소를 위해 황씨는 늘 속을 새까맣게 태웠다. 수환이 권투를 한다고 하자 만류를 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금쪽같은 아들이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오는 모성애 말이다.

“고등학생 때 권투를 하겠다고 말씀드리니까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수환아, 네 아버지 친구 중에 권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40세가 지나니까 침만 질질 흘리고 다니더라. 너도 이렇게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르고, 고생만 할 텐데 왜 하려고 하니’라고.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엄마! 나는 공부도 잘 하니까 권투도 잘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이에요.”

황씨는 아들을 이길 수 없었다. 뜻이 그렇다니 아들의 상처를 볼 용기를 냈다. 결국 권투를 말리던 황씨는 수환의 설득에 KO 당한다. 적극적인 조력자가 된 것이다.

“엄마가 아침에 운동 가라고 매일 깨워줬어요. 운동 열심히 하라고 뱀탕을 끓여 주셨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챔피언 홍수환? 그거 우리 엄마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예요.”

▲챔피언에 등극한 후 지극한 환대와 함께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홍수환과 황농선씨.(사진=국가기록원)

◇ 48세,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엄마

“집 안에서 살림만 하시던 분이 아버지 돌아가시고 미군부대에서 스낵바를 하셨으니까 그것을 보는 게 참 안쓰럽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권투에 미쳤었지. 엄마가 거기서 고생하는 거 신경 쓸 겨를도 없었으니까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황씨는 남편을 잃은 4년 후, 그녀의 나이 48세에 인천 부평에 있는 미군 부대 안에 스낵바를 열었다. 그것은 7남매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던 ‘사회 경험 초짜 엄마’의 선택이었다. 당시 미군부대 안에서 스낵바를 연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는데, 동업자의 도움으로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거기서 황씨는 카투사가 가져오는 미제 버터와 음식을 교환해 주기도 하고, 한국 음식이 그리운 카투사들에게 음식을 해주기도 했다. 카투사의 제 2의 어머니였던 셈이다.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장사가 뜻대로 되지 않자 동업자가 떠나갔다. 그러나 황씨는 7남매 생계의 불씨였던 스낵바를 포기할 수 없었다. 막막하긴 했지만, 억척스럽게 스낵바를 이끌어갔다.

“엄마도 힘들었겠지요. 애들은 커가지 할 것은 이것밖에 없지. 거기에서 죽으란 법은 없더라고요. 결국 우리 큰 형님과 함께 스낵바를 하면서 7남매를 다 키웠으니까. 우리 엄마는 정말 극성이었어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김종필 前총리를 만나고 있는 홍수환과 황농선씨.(사진=국가기록원)

◇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

“엄마한테서 강단을, 아버지한테서 체력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은 유독 운동에 강하죠. 큰형님도 젊었을 때 유도를 하셨으니까 말이에요. 이런 내 근성의 바탕은 부모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홍수환은 권투를 하기에 무엇보다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특히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패기는 그를 챔피언으로 만들어 준 결정적 요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유전자가 챔피언을 만들었다면, 어머니의 사랑은 그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홍수환은 어머니에게서 조건 없는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자라서 자신도 자식들에게 사랑을 줄 수밖에 없게 된 거 같다고 얘기한다.

어머니가 준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기에 홍수환은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을 너무나 후회한다고 했다.

“운동하고 돌아오면 뜨거운 밥에 미제 버터 두 조각 넣어 간장에 비벼 주시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기억나네요. 참 그렇게 사랑을 많이 주셨는데 말이야. 94년도에 어머니가 지병으로 고통스러워 하시니까 그냥 편안히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권투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엄마 가슴에 못을 박은 일이었다는 게 너무 후회가 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라고요.”

“엄마한테서 강단을, 아버지한테서 체력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은 유독 운동에 강하죠. 큰형님도 젊었을 때 유도를 하셨으니까 말이에요. 이런 내 근성의 바탕은 부모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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