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는 일본 천황 장학생으로 일찍 영국 런던에 유학한 적이 있다. 겨우 여섯 달가량 대학 강의를 듣고 나서 그는 더 배울 게 없다면서 귀국해 버렸다. 책만 한 수레 가득 채울 만큼 구입해 화물운송 선박 편에 부쳤다고 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같은 단편소설을 필자도 읽어 봤지만 그의 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의 작품이 일찍 구미(歐美)에서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니 일본 사회의 ‘아이콘’으로 이 나라 화폐에까지 그의 얼굴이 등장하게 된 모양이다.
일본의 영웅은 이 밖에도 즐비하다. 한때 한국 청년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대망’이란 제목의 일본 근대사 소설 시리즈엔 별의별 찬란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요즘 ‘증언록’이란 걸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김종필 전 총리가 하필 그 무렵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그의 정적들의 쟁투에 얽힌 옛 고사를 젊은이들에게 소개한 것과 궤(軌)를 같이해 때 아니게 서울 장안에 일본 열풍이 불었던 게 새삼 떠오른다. 두견새야 울어라,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다(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두견새야 울어라, 울지 않으면 울게 할 거다(도요토미 히데요시), 두견새야 울어라,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릴 거다(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마지막 인물이 최후의 승자가 됐다는 이야기다.
일본뿐만 아니라 역사가 제법 긴 나라치고 대소 간의 영웅이 존재치 않는 경우는 없다. 일본의 형편을 살펴보는 건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차원에서 꼭 필요하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경우 극명히 대비되는 그들의 ‘두 얼굴’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없이 치명적인 게 평화 너머로 잠복해 있는 교활함과 잔인성이다. 중국 문호 루쉰(魯迅)이 이런 점을 간파했다. 그가 일본을 향한 타는 적개심으로 쓴 게 그 유명한 ‘아큐정전’이다.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강자를 만나면 무릎을 꿇는다. 중국과 러시아, 또 조선이 일본에 수모를 당한 건 오직 정신력의 결핍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찬탈당했던 시기에도 조선인의 정신은 미로에 빠져 있었다. 일본의 근대사 영웅 집단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정한론(征韓論)이란 걸 염두에 뒀고 그걸 발판 삼아 대륙을 석권해 이른바 대화혼(大和魂)을 펼치자는 궤변을 농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요즘 행보를 보면 정한론을 떠들던 그 옛날 분위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감히 초강대국 미국의 영토 진주만을 침공했다가 핵무기 세례를 받고 주저앉았던 일본이다. 이제 또다시 어찌 보면 철천지원수일 법한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동아시아 패권을 탐내고 있다.
그러자니 위안부 강제 동원도, 한국 측에 식민지배 등을 포괄적으로 사과한 ‘고노담화’도 부인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지금 잠자던 사자 중국이 깨어나 포효하자 미국이 놀라 일본에 구애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일본과의 안보·경제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점에 필자도 동의한다. 영원한 우방도, 또 적국도 없다는 현실에도 눈감지 않는다. 다만 일본의 경우 그 두 얼굴을 꼭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