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성 칼럼] 사법적 보수주의

입력 2015-06-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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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 몽펠르랭소사이어티 회원)

1987년 여름 어느 늦은 저녁 필자는 미국국영방송(PBS)에서 보크(Robert Bork) 판사의 대법관 인준 관련 상원 청문회의 녹화 중계를 보게 되었다. 미국 사법계에는 사법적 보수주의(judicial conservatism)와 사법적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의 두 흐름이 있다.

사법적 적극주의는 판사의 판결이 현행 법뿐만 아니라 판사 개인의 의견이나 정치적인 고려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견해인데 비해 사법적 보수주의는 판사 개인의 의견이나 정치적 고려를 최대한 억제하고 현행 법에만 의존하여 판결하고 법의 제정은 입법부에 맡겨야 한다는 견해이다.

보크 판사는 사법적 보수주의자로 재량권을 억제하고 헌법과 법에 따라서만 판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판사의 임무는 판결하는 것이지 판사석에 앉아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크 판사는 공정거래법 전문가로도 유명하다. 기업합병은 종종 소비자들에게 유리하므로 이를 금지하는 기존 공정거래법은 경제학적으로 비합리적이고 소비자들에게 불리하다고 주장한다. 즉 공정거래법은 소비자잉여 극대화라는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합병이 독점도를 높여도 소비자잉여가 증대된다면 용인될 수 있다. 이런 주장에 근거해서 독점과 관련된 미국 대법원의 판결은 1970년대 이래로 큰 변화가 있었다.

1987년 7월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보크 판사를 연방 대법관으로 지명하였을 때 흑인 등 소수민족들은 그의 사법적 보수주의 견해가 불리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법관 인준에 반대하였다.

그날 청문회에는 보크 판사를 지지하는 스탠퍼드 법과대학원의 흑인 교수가 나와서 증언하고 있었다. 미국 대학들은 1960년대부터 입학 정원의 일정 비율을 소수민족들에게 할애하는 할당제도(quota)를 시행해 왔다. 이 교수는 이런 제도를 통해 MIT 대학에 입학한 흑인 학생 4명 중 1명이 성적 불량으로 졸업을 못하고 MIT를 졸업한 흑인도 노동시장에서 MIT 졸업생이 아니라 할당제도에 의해 졸업한 자로 취급된다고 지적하였다.

만약 이 제도가 없었다면 이 흑인 학생들은 실력에 맞는 주립대학을 졸업해서 변호사 등 번듯한 직업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과연 이들을 도와주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교수는 소수민족들에게 이렇게 호의(favor)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동등하게 취급해 주는 것(equal treatment)이 진정으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이런 입장에서 보크 판사의 사법적 견해와 판결을 존중하고 대법관 인준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 상원의 다수당인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로 보크 판사는 인준을 얻지 못하였다.

사법적 보수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판사의 과도한 재량권은 국민들에게 큰 불확실성을 야기할 수 있다. 2013년에 통합진보당의 당내경선 대리투표와 관련된 1심 법원들의 판결들이 서로 상반되게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는 대리투표가 무죄라고 판결하였다. 정당의 비례대표 경선에 관해 선거의 4대 원칙(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을 지켜야 한다는 명시적 규정이 없고 조직적 행위가 아니라 가족, 친척, 동료 같은 신뢰 관계자들이 벌인 통상적 대리투표로 선거제도의 본질을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그러나 부산지법, 광주지법, 대구지법에서는 유사한 사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우리나라 민주제도의 근간인 정당 내에서의 경선과 관련하여 대리투표가 유죄인지 무죄인지조차 불확실하다면 일반 국민들이 어떻게 안심하고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인 단체의 장을 선출하겠는가. 마찬가지로 노사관계 등에서 기업이 내리는 결정들이 적법인지 불법인지를 사전에 어느 정도 알지 못하고 사후 판사의 재량권에 속하는 영역이 넓을수록 기업 활동은 위축된다.

최근에 하버드 대학의 흑인 학생들이 “너 읽을 줄이나 아니”라는 치욕적인 말을 백인 학생에게 들었다는 등의 여러 모욕적인 사례들을 사진전을 열어 고발하였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보크 판사를 지지했던 흑인 교수가 머리에 떠올랐다. 흑인 학생들을 백인 학생들과 동등하게 취급해 주는 것이 흑인 학생들을 진정으로 도와주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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