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심장을 이식받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김현중(44)씨와 그를 살린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김재중(57) 교수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열한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충성!”
분주하게 병원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주목한다. 심장이식을 받은 김현중씨가 주치의 김재중 교수를 보자마자 하는 인사다. 김씨에게 김 교수는 생명을 준 대장님이다.
“아이 참, 됐어요. 등산은 잘 다녀왔나요?”
김 교수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안부부터 물어본다. 김 교수에게 김씨는 살아줘서 또 활발히 활동을 해줘서 고마운 전우다.
이들은 다시 뛰는 심장을 공유하고 있는 애틋하고도 강렬한 관계다. 그 중심에는 사후 장기기증을 통해 심장을 내어준 이에 대한 감사함도 얽혀 있다. 이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더 깊게 들여다보기로 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생수 유통업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기침이 나더군요. 가슴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어느 날, 너무 고통스러워서 소리쳤던 날이 기억나네요. 그때 살고 있던 광주광역시 모 종합병원을 찾았는데 심장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요. 심장이식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더군요.”
남들처럼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했던 김씨에게 불현듯 심장병이 찾아왔다. 심장의 펌프 기능이 떨어진 확장성심근병증. 돌연사 확률이 매우 높은 병을 얻게 된 그는 고민에 빠졌다.
병아리 같은 자식과 부인을 두고 갑작스런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은 막아야만 했다. 유일한 해결방법은 아쉽게도 먼저 세상을 떠난 자의 심장을 제공 받아야 하는 것. 심장이식밖에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동네 종합병원에서는 심장이식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김씨는 살기 위해 직접 서울로 가기로 했다.
“동네 병원에서는 심장이식을 할 수가 없었죠. 무의미하게 약만 복용하면서 연명하는 식의 치료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죠. ‘심장이식을 전문적으로 하는 병원에 찾아가자.’ 그래서 수소문 끝에 2009년, 서울아산병원에 왔고 지금 제 대장이신 김재중 교수를 만나게 됐습니다. 유명한 의사라고 해서 뻣뻣할 줄 알았는데, 무척 자상했죠. 왠지 모르게 보는 순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만 믿고 따라가자. 그러면 나는 내 아내와 자식들을 지킬 수 있을 거야’라고 말이죠.”
그 믿음 덕분이었을까. 6개월간의 대기기간을 거쳐 기적적으로 장기기증자를 찾았고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물론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김씨는 점차 건강을 회복했다. 직업도 다시 갖게 됐고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뒷바라지도 이제는 문제가 없다. 다시 뛰는 심장으로 그는 새 삶을 살게 됐다.
“감사합니다. 이 말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해도 모자라다는 것을 아시나요? 특히 저와 같은 심장이식 환자에게는 두 명의 천사가 있죠. 한 명은 바로 옆에 계시는 김재중 대장님이고, 다른 한 분은 심장을 주신 이름 모를 그분입니다. 한시도 잊을 수가 없죠. 잊으면 배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 감사함을 전파하기 위해 김씨는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심장이식 환우회 서울경기지역 지부장을 맡아 환우들과 김 교수의 메신저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 환우들이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기적인 산행모임과 김 교수와의 만남을 병원 밖에서도 이어가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실제로 6월 13일, 남산둘레길 걷기대회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걷기대회는 심장이식 후 운동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환우들과 함께 궁금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자리가 된다. 약 30명의 환우가 참여할 계획이다.
김씨는 김 교수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알찬 시간을 만들겠다고 다짐 또 다짐한다.
“환우회 걷기대회의 장점은 동질감을 느끼는 동료와, 그리고 우리를 이끄는 대장님과 함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죠. 환우들에게는 몇 년이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하는 특별한 시간이 되죠.”
어느샌가 김씨는 김 교수와 함께 행사를 추진하는 기획자로 변해 있었다. 그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받은 만큼, 그 이상으로 나눠야 행복해집니다. 저는 심장이식 이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긍정적으로 밝게 웃음을 짓고 살아야 한다는 것.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심장이식 520건의 사례를 성공시킨 서울아산병원 김재중 교수. 그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심장이식의 한 획을 긋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말만 들으면 권위적일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의 장점은 환자를 가족처럼 보는 세심한 배려에 있다.
특기는 깨알 같은 메모다. 그의 집무실에는 수많은 파일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물론 김씨의 파일도 두껍게 작성됐다.
“심장이식은 이식이 끝난 뒤부터 새로운 치료가 시작됩니다. 면역억제제를 평생 동안 복용해야 하고 다른 이의 장기가 이식된 것인 만큼 사소한 부분이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환자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게 제 임무죠.”
무덤덤하게 별일 아닌 듯 들려주는 김 교수의 말. 그런데 그것을 아는가. 깨알 노트가 심장이식 환자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실제로 서울아산병원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의 생존율은 국제심폐이식학회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10년 생존률: 아산병원 75%, 학회 47%)를 기록하고 있다.
‘밴드’로 매일 만나는 사이
김 교수는 매일 1시간 동안 밴드(모바일그룹 메신저)를 한다. 환자들의 질문, 사소한 고민에까지 일일이 답변을 달고 있다. 김씨가 환우들의 의견을 받아 대표로 질문을 올리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깨알 노트를 기반으로 환자에게 생기는 작은 변화를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는 일종의 소명감에서 하는 일이다. 굳이 아산병원 환자가 아니더라도 질문의 답은 꼭 해주고 있다.
“사실 외래진료가 밀리고 여러 일정이 잡히면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도 꼭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소통을 했었는데 이제는 휴대폰으로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활용해야죠.”
뇌사자 장기기증 활성화, 우리의 소망
김 교수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말이다. “심장이식을 기다리는 환자가 아직 많이 있습니다. 장기기증을 통해 새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큰 가치를 믿고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서약에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김씨도 덧붙인다. “제가 받은 새 생명은 장기기증자의 또 다른 삶이기도 합니다. 저의 모든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 뇌사자 장기기증이 활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새로운 심장을 갖게 된 김현중씨와 주치의 김재중 교수는 누구보다 따듯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병원 밖에서도 수시로 만나 일상을 함께하는 둘의 모습은 평생 관리가 필요한 심장이식 환우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