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1864~1921)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쓴 언론인이다. ‘이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뜻이다. 위암은 이 글을 통해 국권침탈 조약을 폭로하고, 일제의 침략과 을사5적을 규탄하면서 국민의 총궐기를 호소했다. 체포된 위암은 65일간 옥살이를 한 끝에 석방됐고, 황성신문은 압수 및 정간처분 당했다.
5년 후 경남일보 주필이던 1910년 8월에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한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의 ‘절명시(絶命詩)’를 신문에 실었다가 폐간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그러나 1914~1918년 총독부 어용신문 매일신보의 주필로 친일 한시와 사설을 실었다는 논란에 휘말려 2011년 4월 서훈이 취소되는 불명예를 겪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한 이후다. 유족들은 서훈 취소가 부당하다는 소송을 내 고법에서 이기기도 했으나 지난해 10월 끝내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위암이 말년에 의병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나와 논란은 그치지 않고 있다.
위암은 언론인으로만 평가할 인물이 아니다. 57세에 사망했지만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일사유사(逸士遺事)’ 등 초인적 저작을 남긴 유학자(儒學者)였다. 그는 시와 술을 좋아해 ‘서치주광(書癡酒狂)’을 자처했다. 초상화에 써 놓은 자찬시(自撰詩)는 이런 내용이다. “네 뼈는 울근불근 네 모습 훤칠하다/눈은 어찌 반짝반짝/머리는 어찌 그리 세었나/석굴 속의 석가모니가 아니라면/책벌레 술 미치광이가 분명하구나.”[爾骨陵爾貌昻藏 目何炯炯 髮何蒼蒼 不是石室瞿曇 定是書癡酒狂] 얼마나 글과 술을 좋아했으면 자신 있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