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기사 양반, 니미시벌 아파트로 가유~

입력 2015-07-2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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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보고 싶어 서울에 온 시골 할머니. 서울역에서 택시를 타고 아들네가 사는 아파트 이름을 말하려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기사 양반, 전설의 고향을 지나 양재동에 있는 니미시벌 아파트로 가유.” 택시기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예술의전당을 지나 리젠시빌 아파트에 할머니를 내려줬다. 택시기사의 뛰어난 언어추리력(?)에 유쾌해지는 우스개다.

건설사들이 아파트 이름으로 경쟁을 벌이면서 별의별 이름들이 다 등장하고 있다. 대부분 영어, 프랑스어에 우리말을 더해 길고 어렵다. 해당 건설업체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정체불명의 이름도 많다. 기자도 한 번 들어서는 절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시부모를 못 오게 하려는 며느리들의 요구가 반영됐다는 우스개가 나왔을까. 건설업계 관계자들은 이름을 특이하게 지어야 소비자들의 흥미를 자극해 아파트 인지도가 올라가고, 그래야 분양률도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말보다 외국어가 더 고급스럽다고 느끼는 잘못된 언어의식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다.

브랜드 가치평가 전문회사인 브랜드스탁이 최근 발표한 아파트 부문 연간 브랜드가치평가지수(BSTI) 순위를 보면 이 같은 현상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 있다. 힐스테이트, 롯데캐슬, 아이파크, 위브, 호반베르디움, 센트레빌, 더샵, 스위첸, 한라비발디, 리슈빌, 데시앙, 코아루 등 영어나 프랑스어에서 따온 이름들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상위 24위권 안에 우리말 아파트 이름은 꿈에그린과 하늘채 두 개밖에 없다.

언뜻 봐서는 우리말인지 외국어인지 구분조차 안 되는 아파트 이름도 있다. 몇 번을 봐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푸르다라는 순 우리말에 대지, 공간을 뜻하는 ‘GEO’를 결합한 ’푸르지오’, 영어 ‘e(experience의 첫 글자)’와 우리말 편한 세상의 합성어 ‘e편한세상’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보그병신체’의 이름 짓기가 불러온 결과다. 보그병신체란 유명 패션 잡지인 ‘보그’에 비속어인 ‘병신’을 붙인 신조어다. 우리말로 표기는 하지만, 외국어나 다를 바 없는 국적 불명의 명칭이나 문장 등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사이드 쉐이프를 고려해서 플랜을 플렉시블하게, 레벨을 풍성하게 하고, 이 박시한 쉐이프에 리듬감을 부여해서…”(영화 ‘건축학개론’ 중 대사) 식의 문장이다. 외래어나 외국어를 남용한 결과다.

‘병신’은 신체의 부위가 온전하지 못한 기형이거나 그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 혹은 그런 사람을 일컫는다. ‘불구, 무능, 부족, 불편’ 등의 의미를 함유해 주로 남을 욕할 때 쓴다. 따라서 이런 말은 되도록 쓰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언중 사이에 보그병신체란 말이 오르내리는 건 우리말의 잘못된 표현들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말과 글을 지키고 발전, 계승하는 일은 국민의 기본이다. 글로벌 시대라지만 민족의 정신인 말과 역사는 살아 있어야 한다. 국가도 없이 전 세계를 떠돌던 유대민족이 2000년 만에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신앙과 더불어 언어를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 건설업계도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겠다는 생각보다는 건물을 튼튼하게 잘 지어 경쟁률을 높이는 데 집중했으면 한다. 희망적인 건 건설사들이 요즘 우리말 아파트 이름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시부모가 아파트 이름이 어려워 한 번 오면 다시 찾아오기 어려워 안 간다나 어쩐다나. 개나리, 무지개, 은하수, 별가람…. 우리말 아파트 이름이 얼마나 정겹고 편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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