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 전 실향민들이 새우잡이로 삶의 터전을 닦았다는 소래포구. 일제시대 때 염전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해양생태공원의 갈대 사이로 옛 소금창고가 보인다. 저 멀리서 항구로 돌아오는 작은 어선과 일렁이는 물결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듯하다. 협궤열차는 사라졌지만 58년 4개월간의 추억을 안은 철길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바닷길을 이어주는 것처럼. 이가림 시인은 시 ‘소름창고가 있는 풍경’에서 “소래포구 어디엔가 묻혀 있을/ 추억의 사금파리 한 조각이라도/ 우연히 캐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셈을 슬그머니 감춘 채/ 몇 컷의 흑백풍경을 훔치러 갔다…(중략) 풍경의 틀에 끼워져/ 한 포기 나문재로/ 흔들리고 말았음이여”라고 노래했다.
소래는 지명과 관련해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소라처럼 생긴 모습에서 비롯됐다는 설, 냇가에 숲이 많다는 뜻의 ‘솔내(松川)’에서 유래했다는 설, 좁은 지형을 의미하는 형용사 ‘솔다’에서 생겨났다는 설 등이다. 그리고 또 하나 유쾌하지 않은 내용도 있다. 신라 무열왕 7년(660년)에 당나라 소정방이 나당연합군의 일원으로 백제를 치기 위해 중국 산둥성의 라이저우(萊州·래주)를 출발해 덕적도를 거쳐 이곳에 왔다고 해서, 소정방의 ‘소(蘇)’ 자와 래주의 ‘래(萊)’ 자를 합쳐 ‘소래’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유래설은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있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지명과 관련해 소래포구 관할청인 인천시 남동구청에 문의한 결과 이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2011년 발간한 ‘남동구 20년사’에 소정방과 관련한 소래 지명의 유래설이 기록돼 있다. 중등 교사 등 전문가들이 쓴 내용이다. 여러 유래 설 가운데 하나이므로 한자 등 내용을 개선할 계획은 없다. 역사적 사실이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고 본다.” 하지만 옛 문헌 어디에도 소정방이 이곳에 상륙했다는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금강하구인 기벌포를 통해 상륙했다는 기록만이 존재한다. 언제부터 지금의 소래(蘇萊)로 한자가 쓰였는지도 뚜렷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결국 이는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로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소래의 지명을 언어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어떨까?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 ‘수리’가 ‘소래’로 변했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더불어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을 의미하는 우리 옛말 ‘솔’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솔깃하다. 소래에 자리한 소래산이 해발 299미터이니 참으로 그럴 듯하다.
금빛 석양의 낭만은 물론 싱싱한 해산물을 즐길 수 있는 소래포구는 여름철이면 휴가객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무의도를 비롯해 을왕리해수욕장, 대명항 등 인근 휴가지를 다 섭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높은 인기만큼 소래란 지명의 유래가 명확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