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한(恨)을 키우는 ‘위안부 기림비’

입력 2015-08-2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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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퇴촌에 위치한 나눔의 집.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곳에서 영화시사회가 열렸다. 머나먼 타국 전쟁터에서 고통 속에 숨진 어린 소녀들의 혼을 고향으로 불러온다는 의미를 담은 영화 ‘귀향’이다. 스크린에는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는 소녀들의 처절한 신음이 이어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강일출(87)·박옥선(91)·이옥선(88) 할머니와 조정래 감독, 출연 배우, 시민 등 300여 명은 숨소리도 죽인 채 관람했다. 그러다 아리랑 노랫가락에 영화 주인공의 아버지가 지게에 딸을 태우고 풀밭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소녀 연기를 한 배우들은 정신적 충격으로 전문의의 상담을 받으며 촬영에 임했다.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이후엔 감독도 배우도 스태프도 다 같이 울었다.” 조정래 감독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영화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강일출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을 모티브로 제작됐다. 일본군에 처참하게 처형돼 구덩이 속에서 불태워지는 소녀들의 모습으로, 강일출 할머니가 직접 목격한 장면이다. 4만여 국민의 후원으로 13년 만에 탄생한 영화가 역사의 사실을 알리는 데 귀한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영화시사회 이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아베 담화와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 대응전략 토론회’에서 국내외에 위안부 기림비를 계속해서 세울 예정이라고 밝혔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캠페인,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기림비 건립에도 계속 힘을 쏟을 것”이라며 “해외에서는 미국 시카고, 호주, 캐나다 등에서 기림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는 올해 대전 보라매공원, 광주시청 앞 광장 등 9곳에 기림비를 세웠고, 연말까지 서울, 세종시 등 6곳에 더 세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대협의 의지는 잘 알겠다. 그런데 기림비라니! 당찮은 소리에 언짢다. ‘기림비’는 기리다의 명사형 ‘기림’에 표식을 뜻하는 한자말 ‘비(碑)’를 붙여 만든 말이다. ‘기리다’는 ‘뛰어난 업적이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등을 칭찬하고 기억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기림비란 말은 절대로 쓸 수 없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원통해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분들에게 누가 무슨 생각으로 갖다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말이 바를까?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을 담은‘추념비’나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어떤 사실을 적어 세우는 비석’이란 의미의 ‘불망비’, ‘기억비(記憶碑)’ 등으로 쓰는 게 좋다. ‘추모비’는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하기 위해 세운 비로, 생존 할머니들이 계시기에 이 또한 적절치 못하다.

충남 공주시 영명고등학교에는 해원비(解寃碑)가 있다. 공주시 고등학교 학생연합회가 서명과 모금운동을 벌여 세운 비석이다. “잊지도 않겠지만 용서도 못하리라/ 꽃다운 청춘 나이 일본군에 끌려가/ 님들은 지옥 같은 날 당하고 견디셨네// 그러나 님들이여 그 원한 놓으시고/이제는 남은 세월 편안히 쉬시옵고/ 목숨이 다하시는 날 천국 위로 받으소서” 비석에 새겨진 나태주 시인의 시조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해원비라는 명칭은 학생들이 직접 결정했다. 위안부를 기린다는 말은 얼토당토하지 않다고 생각해 ‘할머니들의 원한을 풀어 드리는 비석’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영명학교 후배들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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