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업을 하는가 19]성공한 벤처인보다 철학이 있는 기업인이고자 하는 이유

입력 2015-09-2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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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테르텐 대표이사(한국여성벤처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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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선배 김창범 대표가 종자돈 투자…나에겐 ‘엔젤’

SW가 제값 받지 못하는 현실 “회사 접어야 하나” 고민도

KAIST 박사 과정 말미였던 1998년 집안 일로 인해 부득이 휴학을 해야 했던 나는, 두 학기 휴학 후 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지금의 보안소프트웨어 회사인 ‘테르텐’을 KAIST 선배, 동기들과 함께 2000년 창업했다. 창업하자마자 지금은 사라진, 그러나 한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고의 보안관제 서비스 회사 해커스랩의 CEO이자 KAIST 86학번 선배였던 김창범 대표를 통해 4억원의 창업 종잣돈을 운 좋게 투자받았다.

IR 자료도 쓰지 않고 IMF가 지나간 싸늘한 테헤란로에서 시작한 무계획 창업에, 우리 네 사람의 실력과 패기를 믿고 투자를 해 주었으니.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바로 말로만 있다는 ‘엔젤’이 김창범 대표였던 것 같다.

의욕에 찬 창업은 선배의 투자로 순풍의 돛이 달린 듯 나아갔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그러하듯 첫 번째 고비가 왔다. 바로 그건 첫 제품인 오피스 문서의 저작권 보호 기능을 제공하는 이른바 테르텐 문서 디지털저작권관리(DRM)인 다큐쉘(Docu-Shell)을 판매할 때마다 고객사 용으로 커스터마이제이션(customization·고객화)을 요구하는 관행에 부딪힌 것이다. 우린 그 순간 아주 쉽게 시장을 포기해 버렸다. 소프트웨어를 고객사 별로 수정하는 순간 받은 돈은 독이 된다고 믿었다. 고객사가 100개면 제품도 100개. 결국 업그레이드 이슈가 발생할 때 대란이 올 것이고, 그것이 기업에 독이 된다고 확신했다.

이에 기업간거래(B2B) 제품이었던 다큐쉘을 포기하고 소비자거래(B2C)까지 영역을 넓힌 제품인 멀티미디어 저작권 솔루션(멀티미디어 DRM) ‘미디어쉘(Media-Shell)’을 출시했다. 그리고 고객사가 점점 늘어가던 2006년에 두 번째 고비가 왔다. 대한민국에서는 소프트웨어를 팔아도 제값을 받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EBS, 강남구청 수능서비스(인강), YBM Sisa, 정철어학원, 이투스 등 국내 유수의 이러닝 서비스업체 중 70% 가까이 고객사로 확보했다. 또한 음악, 영화, 만화 등 국내 멀티미디어 서비스 시장의 60%가량을 점유했다. 한 예로, 한때 유행했던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의 뮤직온 및 라라라(LaLaLa) 음악서비스, 싸이월드 배경음악 등의 음원저작권 보호를 비롯해 영화, 만화 등의 콘텐츠 서비스를 했던 주요 국내 포털 사이트들이 우리 고객사였다. 그런데 제 값을 받지 못해 큰 돈이 되지 못했다. 일반 개인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는 공짜에 가깝게 저렴하다는 선입견이 시장에 팽배했고, 유지보수 비용에 대한 개념이나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했다. 즉 한 번 판매하면 영원히 돈을 못 받고 지속적인 무상 업그레이드에 시달려야 했다.

또 PMP, 전자사전, MP4 플레이어, 스마트폰 등 디바이스용 데이터 유출방지 솔루션시장 1위 기업이었음에도, 그래서 누적 판매 대수 300만~400만대 이상의 디바이스를 판매했음에도 우리와 거래했던 40개 가까운 제조사들 중 누구도 대당 라이선스를 지불해 주는 곳은 없었다. 잘 받으면 모델당, 영세한 곳은 연간 라이선스를 지불했다.

창업 전 실리콘밸리의 창업 분위기와 시장 상황을 책과 잡지 등으로만 접했던, 그래서 한국 현실에 무지한 나에게 그 당시 대한민국 시장은 참 냉혹하고 어이없었다. “회사를 접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해외로 나가봤다. 하지만 초고속 유무선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솔루션을 개발한 우리에게 전 세계 어디에도 우리 솔루션을 탑재할 만한 네트워크 환경을 갖춘 나라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모바일의 경우도 피처폰 상에서 초기적인 콘텐츠 서비스가 시도되고 있을 뿐이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잘못된 시장 분석으로 ‘타임 투 마켓(Time-to-Market)’에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외에 팔 곳이 없는 솔루션을 개발한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국시장을 지키며 멀티미디어 디바이스 저작권 보호 기술 1위 기업이란 영광 뒤의 씁쓸함을 이겨내며 두 주먹을 쥐어야 했다. 우리가 만약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창업했더라면 아마도 아주 큰 액수에 인수합병(M&A) 되지 않았을까? 솔직히 말하면 2000년대 초·중반을 풍미했던 우리 기술과 우리 제품에 대해서는 아직도 자부심이 든다. 그 결과 미국 정보기술 전문지인 레드헤링(Red Herring)이 꼽은 전 세계 100대 기술기업에도 들었다. 당시 같이 수상한 기업들의 상당수가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경영의 신 마쓰시다 고노스케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기업의 큰 성공은 운에 달렸고 기업의 실패는 실력에 달렸다. 그러니 운이 올 때까지 실력으로 기업을 지켜라.”

성공한 벤처인이 되고자 했던 적은 없었다. 당연히 성공할 줄 알았고 그래서 멋진 벤처인, 존경 받는 벤처인이 되고자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공이 어쩜 나와 무관한 그 무엇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망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마쓰시다 고노스케의 말을 접했고, 마치 이 말은 긴 어둠의 한 줄기 빛이 됐다.

창업 15년차, 벤처인으로 시작한 나는 어느덧 기업인이 돼 가고 있다. 300개가 넘는 고객사를 확보했고, 여전히 소프트웨어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주저하고 업그레이드 비용과 유지보수 비용에 인색한 한국 시장이지만, 꾸준히 매출 성장을 하고 있다. 올해 50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으며, 내년엔 코넥스 상장을 계획하고 있다.

또 성공이란 목표보다는 100년을 내다보는 기업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으며, 직원들의 꿈과 비전, 그리고 그들의 행복이 우리 회사를 통해 실현될 수 있기를 바라며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성공을 얘기하기엔 너무 이른 지금, 한국여성벤처협회 회장을 올해부터 맡으면서 내가 걸어 온 길에서 무수히 맞닥뜨렸던 시행착오를 후배들은 반복하지 않도록,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장애물에 여성기업인이라는 이유로 좌절을 겪지 않도록 작은 지혜라도 나누고 싶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15년이라는 업력 속에서 개발했던 제품들과 이용해 준 고객들, 그리고 늘 밤이나 낮이나 함께 호흡했던 직원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앞으로의 15년은 분명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는, 또 다른 끝없는 도전이 이어지는, 그리고 새로운 역사와 기업 철학이 함께하는 15년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약력>

1995 KAIST 암호학 석사

1999 KAIST 암호학 박사 수료

2000~ 테르텐 대표이사

2009 대한민국신성장동력 우수기업

2009 여성무역인력유공자 국무총리표창

2009 우수 여성벤처기업인 특허청장상

2012 대한민국멀티미디어기술대상

2012~ KOTRA ICT·SW 중소기업 수출지원센터 전문위원

2013 미래창조과학부장관 표창

201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기술정책위원

2014~ 국가과학기술심의회 미래성장동력 특별위원

2014~ 요즈마그룹 한국법인 고문

2014~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2015~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2015~ 중소기업진흥공단 운영위원

2015~ 한국여성벤처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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