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 높을수록 그림자도 길다. 더 빠르고 편리한 트레이딩 시스템이 생기고, 수익구조가 복잡한 상품들이 쏟아지는 등 국내 증시 수준이 높아지는 한편에선 이를 이용한 범죄도 나날이 혁신과 창의를 더해간다.
그때마다 금융당국은 대응책을 내놓고 조사ㆍ감독 체계 전반에 변화를 주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이미 일반 투자자들은 돈을 잃고 난 뒤다. 해외 증권범죄 조사 체계와 비교하면 사후 피해보상 또는 처벌 시스템 등에서 아직 갈길이 멀다.
◇SNS 타고 진화하는 증권범죄 = 2000년부터 인터넷 주식동호회에서 ‘미래칩스’라는 필명으로 인기를 끈 A씨는 일명 ‘사이버 애널리스트’로 불렸다. 그의 주가분석과 종목추천 등에 많은 투자자들이 따랐다. ‘다음 카페’, ‘네이버 카페’ 등 인터넷 동호회 문화가 대중적으로 자리 잡던 시기였다.
그러나 A씨는 ‘투자고수’가 아닌 범죄자로 남게 됐다. 자신이 매수한 종목을 인터넷과 ARS방송 등 각종 정보전달 매체에 소개한 후 주가가 오르면 보유물량을 처분해 불공정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2003년 금융감독원은 A씨를 당시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애널리스트의 직접 시세조종으로 적발된 첫 사례이자 새로운 정보전달 매체를 활용한 신종 사기행위였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2015년에는 인터넷 카페가 아닌 손 안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로, 증권업 내 특정 직군이 아닌 시장에 발을 담군 참여자 전반으로 범죄 무대가 이동했다. 공모를 통한 시세조종과 미공개정보이용 위주이던 범죄 양태도 금융당국의 적발 시스템 강화와 다양한 수익상품 출현으로 매우 다양하게 변했다.
일반투자자 B씨는 주식투자 유료 카페에 가입한 투자자들을 다시 폐쇄적 형태의 SNS인 네이버 ‘밴드’로 유인했다. BT씨는 SNS에서 매매시기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며 특정회사 주가를 인위적으로 띄웠다. 지난 8월 금융위원회 자본시장조사단은 B씨를 검찰에 넘겼다.
애널리스트의 도덕성 논란에 이어 회계사 윤리문제도 불거지며 증권시장 참여자 전반의 윤리의식에 대한 자성도 나왔다. 지난 8월 국내 최대 회계법인의 젊은 회계사 9명이 금융당국에 불공정거래 혐의로 적발됐다. 감사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상장법인의 영업실적 정보를 이용해 미리 주식을 매매한 것이다. 이들은 카카오톡, 바이두, 텔레그램 등 메신저를 돌아가며 사용하면서 은밀한 정보 거래 흔적을 지우려 했다.
주가연계증권(ELS)과 기업인수목적회사(SPACㆍ스팩) 등 최근에 등장한 상품이나 회사형태와 관련한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올해 4월 대법원은 ELS의 헤지 증권사가 기초자산을 대량 매도해 상환조건 성취를 무산시킨 것과 관련해 해당 ELS를 보유하던 투자자에게 손해를 입혔다는 점을 인정했다.
스팩의 전 대표이사가 해당 스팩이 한 비상장회사를 흡수합병한다는 정보를 업무상 알게 된 후 이를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득한 사건도 적발됐다.
◇디지털포렌식 수사법 등장…미공개정보 이용 ‘엄벌’ = 날로 진화하는 증권범죄를 잡기 위한 금융당국의 처방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 5년간 가장 큰 변화는 지난 2013년 4월 18일에 발표된 ‘주가조작 등 불공정거래 근절 종합대책(4ㆍㆍ18 대책)’이다.
당시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한국거래소, 법무부, 국세청 등이 공동으로 4ㆍ18 대책을 내놓으면서 금융위원회 내에 증권 범죄 조사전담부서인 ‘자본시장조사단’이 설립됐다.
자조단에는 ‘Fast Trac(패스트 트랙)’이라는 강력한 조사 절차가 도입됐다. 기존에 거래소의 거래이상감지 신호가 금감원에 전달된 후 조사를 거쳐 검찰에 수사 통보하는 시스템이었다면, 패스트트랙 제도에서는 검찰의 강제수사가 즉시 필요한 경우 증권선물위원회 위원장이 검찰에 바로 수사를 통보해 처리할 수 있다.
특히 조치(제재)도 대폭 강화됐다. 과거 징역형 또는 벌금형이 부과되던 체제에서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징역형이 선고될 경우 필수적으로 벌금형이 병과되도록 바뀌었다. 몰수·추징도 의무화해 부당이득을 얻은 경우 최소 2배 이상 물어줘야 한다.
형사 처벌 대상인 불공정거래 보다는 수위가 낮지만 반드시 통제가 필요한 ‘시장질서 교란행위’에 대해서도 기존에 없던 과징금 규제를 신설해 제재 실효성이 높아졌다.
특히 올해 7월부터는 시장질서 교란행위 제재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기존에는 미공개중요정보를 누설하거나 이 정보를 처음 전달받은 1차 정보수령자만 처벌받았지만 지난 7월 이후부터는 2차 정보수령자도 미공개중요정보를 이용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조사ㆍ수사 단계에서도 금융당국은 최근 검찰 협조를 통해 디지털포렌식 수사기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디지털포렌식 수사법은 범죄수사에 적용되는 과학적 증거 수집 및 분석기법의 일종으로 각종 디지털 데이터와 통화기록, 이메일 접속기록 등의 정보를 분석해 증거를 색출하는 방식이다.
자조단은 지난해 삼성테크윈(현 한화테크윈)의 피인수 정보를 두고 전현직 임직원 4명이 불공정거래를 저지른 사건을 조사할 때 디지털포렌식 기법을 처음 사용해며 미공개정보 전달 과정을 입증했다. 이 방법은 최근 회계사들의 SNS를 이용한 미공개중요정보 불공정거래 사건 조사에도 활용됐다.
한편 지난 8월부터 자조단 조사공무원에 부여된 특별사법경찰권도 증권 범죄 잡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사당국 일원화 숙제…민사제소권 공백도 메꿔야 = 증권 범죄를 잡기 위한 금융당국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현행 체제에서도 실효성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위 자조단은 금감원 파견 직원 9명, 파견 검사 2명, 법무부 직원 3명을 비롯해 거래소 직원과 금융위 소속 공무원 등 2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반면 금감원 자본시장조사국 3개 부서 인원은 파견인원을 제외하고도 90명에 달한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한국거래소에서 금감원으로 보낸 통보 사건은 전년 동기 대비 39% 가량 줄었다. 패스트트랙을 활용해 자조단으로 직접 통보하는 사건이 늘었기 때문이다. 또한 금감원에서 조사 중이던 사건의 중요성이 크다고 판단될 경우 자조단으로 넘겨야 하기 때문에 업무흐름이 끊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기 진작 면에서도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푸념이 나오는 상황이다.
한편 조사당국에 아직 민사제소권이 없다는 점도 공백으로 지적된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경우 형사와 민사 중 적절한 제재방향을 고려해 사안마다 대응 방식을 달리 하고 있다. 민사소송으로 진행할 경우 대개 본안에 가기 전 화해과정에서 손해배상액을 정하는 등으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아 형사소송시보다 간편하다.
또한 벌금이나 과징금은 세액으로 잡혀 자체 활용이 불가능하지만 민사소송을 통한 손배금액은 활용이 가능하다. SEC는 이러한 자금을 공정배분펀드(Fair펀드)와 투자자보호기금 등으로 조성해 증권범죄로 피해를 입은 투자자 등에게 기여하고 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형사소송 과정에서는 증권범죄 조사 실무자에서 사건검사에게로 이관되고 공판에서는 다시 공판검사에게로 넘어가다보니 실제 공판장에서 입김이 가장 센 사람은 기업 측 대변을 위해 나온 로펌의 전문변호사”라며 “승소확률이 확실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점점 다양해지는 증권범죄를 억지로 분산하기 보다는 하나의 통일된 조직에서 실무자들이 책임있게 끝까지 맡아 처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특히 민사소송이 가능해지면 조사 실무자가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책임성’이 더욱 강화되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