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가 성적장학금을 폐지키로 했다. 성적을 기준으로 한 기계적인 장학금 지급이 아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 돌려주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다소 파격적인 시도다. 성적장학금은 내년도 신입생에게 지급하기로 예정된 24억원의 장학금을 마지막으로 중단된다.
고려대학교는 14일 서울 안암동 본관 3층 회의실에서 '미래인재 육성 기금'을 주제로 장학제도 개편안을 발표했다. 성적 기준의 지급이 아닌 '필요기반' 지급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학교 측에 따르면 소득분위에서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1-2분위) 학생들은 기존 국가장학금의 최대 수준인 480만원과 교내장학금으로 등록금 100%를 면제받게 된다. 이 중 기초생활수급자 학생들은 30만원 가량의 특별생활 지원금 명목의 생활비를 추가로 지급받게 되며 기숙사 역시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차상위계층은 '근로장학생' 선발에서 우선권을 준다. 이 근로장학금의 경우 현재 시급 5800원 보다 두 배 가량 높은 한 시간당 1만원을 지급, 월 40만원을 받게 된다. 일하는 시간은 주 10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다만 3-5분위 학생들은 신청 후 심사를 통해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
염재호 총장은 "등록금만 해결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가 필요하다"며 "우리 학교 학생들 만큼은 적어도 생활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염 총장은 "장학금이 우수한 성적에 대한 보상이 되어선 안된다"는 기존의 입장을 이날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이로써 고려대의 성적장학금은 내년도 신입생에게 지급하기로 예정된 24억원의 장학금을 마지막으로 폐지된다.
고려대는 새로운 장학제도의 이름을 교훈인 '자유·정의·진리 장학제도'로 각각 명명했다. 자유장학금(자치와 자율)은 학생의 자치활동 장학금과 근로장학금으로 구성되며, 정의장학금(필요기반)은 경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장학금, 즉 생계 곤란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이다. 진리장학금(프로그램 기반)은 학업과 연구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비전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한 장학금이다.
이 중 프로그램 기반 장학금인 진리장학금에 기존에 재학생들이 받아오던 성적장학금의 대부분이 투입된다.
학교 측은 학생들의 해외연수나 외국어 향상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는 진리장학금이 새로운 개념의 장학금이라고 설명했다. 이 장학금은 학생들이 체험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직접 설계·제안하면 장학위원회가 심사를 거쳐 장학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교환학생을 가고 싶어도 형편이 어려워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배려해 한 학기 1000만원 정도의 생활비와 항공료를 지원하게 된다.
고려대는 지난 2013년부터 프로그램 기반 장학금 중 하나인 '차이나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앞으로 라틴아메리카·베네룩스3국·일본·유럽 등으로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학교 측은 2016년 '자유·정의·진리 장학금'에 각각 35억, 200억, 100억의 예산을 편성했다. 여기다 신입생들에게 지급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24억원을 더해 예산액은 모두 359억원이다. 이는 올해 장학금 예산인 333억원에서 약 7% 증가한 수치다.
염 총장은 "성적 우수자에겐 경제적 보상이 아닌 명예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며 "장학금은 필요로 하는 학생에게 먼저 줘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총장 선거 당시 장학금 확충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염 총장은 결국 성적이 아닌 '가정 형편을 고려한 장학금'으로 가닥을 잡아 자신의 공약을 실현하게 됐다.
염 총장은 이날 "학생들이 고려대에 들어오기 위해 서울 대치동에서 1000만원짜리 논술 과외를 한다는 말에 가슴이 무너졌다"며 "정말 어려운 학생들을 지원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철학이 이번 장학제도 개편에 담겨 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한편 이날 고려대 제47대 총학생회는 "실질적인 수혜자인 학생을 대표하는 총학생회와 논의조차 없었다"며 "학생들을 배제한 장학금 개편은 학내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학생들은 "학교 측은 즉시 학생들에게 장학제도 개편안을 제대로 설명하고, 이에 관한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