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암살’ 박인비(27ㆍKB금융그룹)도 리디아 고(18ㆍ한국명 고보경)의 상승세는 막지 못했다. 인천을 골프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KEB 하나은행 챔피언십(총상금 200만 달러ㆍ약 22억8000만원) 이야기다.
이 대회 최대 관심사는 세계랭킹 1ㆍ2위 박인비와 리디아 고의 맞대결이다. 대회 첫날 각각 다른 조에서 경기를 펼친 두 선수는 16일 열린 2라운드에서 같은 조로 묶였다. 두 선수의 맞대결은 대회장을 찾은 많은 갤러리 시선을 강탈했다. 이 대회 성적에 따라 세계랭킹 1위 자리가 바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두 선수는 올 시즌 세계랭킹 1ㆍ2위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눈부신 결과물이 많다. 박인비는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며 LPGA 투어 사상 7번째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리디아 고는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 에비앙 챔피언십 정상에 오르며 최연소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닮은 점도 많다. 호쾌한 장타보다 정확한 골프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드라이브샷보다 아이언샷, 아이언샷보다 어프로치와 퍼트가 뛰어나다. 거기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까지 세계 여자골프를 주름잡는 두 선수 사이엔 공통분모가 많다.
특히 박인비는 ‘침묵의 암살자’라는 닉네임이 붙을 만큼 조용한 카리스마가 장기다. 표정만 보면 버디인지 보기를 범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동반 플레이어는 그런 박인비의 침묵에 스스로 무너진다. 그래서 ‘침묵의 암살자’다.
하지만 16일 열린 2라운드에서는 박인비의 침묵에도 리디아 고는 무너지지 않았다. 리디아 고는 이날 보기 없이 버디만 7개를 작성하며 중간합계 10언더파 134타로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반면 박인비는 스코어를 줄이지 못하고 공동 25위로 밀려났다. 박인비의 침묵 카리스마도 리디아 고에겐 통하지 않았다.
리디아 고의 최근 경기력을 보면 그야말로 리디아 고 시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8월 열린 캐나다 퍼시픽 여자오픈에 이어 9월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지난주 사임다비 말레이시아에서는 준우승을 차지, 최근 3경기에서 우승 2회, 준우승 1회라는 경이로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리디아 고의 경이로운 행보는 시즌 초반부터 시작됐다. 개막전인 코츠골프 챔피언십 공동 2위를 시작으로 6대회 연속 톱10에 이름을 올리며 ‘골프 천재’ 본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메이저와는 인연이 없었다. 최연소 메이저 챔프라는 타이틀이 부담됐을까. 시즌 첫 메이저 대회 ANA 인스퍼레이션 공동 51위, KPMG 위민스 챔피언십 컷 탈락 등 메이저 대회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US여자오픈에서 공동 12위로 선전했고,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선 공동 3위, 그리고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최연소 메이저 챔프 기록을 경신했다.
최연소 메이저 챔프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서일까. 리디아 고의 최근 경기력은 더욱 물이 올랐다. 만약 이 대회에서 리디아 고가 우승한다면 박인비의 대회 결과와 상관없이 세계랭킹 1위 자리를 되찾는다. 18세 천재 골프소녀 리디아 고가 전 세계 골프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그야말로 리디아 고 전성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