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개암(헤이즐넛) 커피를 마시며

입력 2015-11-0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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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매우 비싸고 귀한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부엌 찬장 깊숙이 커피를 넣어 두고 귀한 손님이 올 때만 대접했다. 어린 나는 꽃무늬의 무거운 커피잔에서 풍겨나는 그 향이 좋았다. 설탕이 듬뿍 들어간 갈색 액체가 어떤 맛을 낼지 몹시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커피맛을 볼 기회가 왔다. 정말 감사하게도 손님이 커피를 남기고 간 것이다. 엄마가 배웅 나간 틈을 타 오빠와 한 숟가락씩 떠먹었다. 쌉쌀하고 달콤하며 고소한 그것이 목으로 넘어가는 게 아까워 입안에 계속 담고 있었다.

시인 이상(1910~1937)은 커피가 좋아 카페(종로 ‘제비다방’) 사장이 됐다. 이상만큼이나 커피에 빠졌던 가산 이효석(1907~1942)은 낙엽을 태우며 커피향을 음미했다. 그에게 낙엽 타는 냄새는 헤이즐넛(Hazelnut) 커피향 같았나 보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뇌막염을 앓다 35세에 요절한 천재 문인 이효석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커피향을 묘사한 대목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개암 커피’에 푹 빠져 지낸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좋아서이다. ‘개암 커피가 뭐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독자가 있겠다. 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헤이즐넛(hazelnut) 커피가 바로 개암 커피다. 헤이즐(hazel)은 ‘개암나무’다. 개암은 개암나무의 열매로, 모양과 맛이 밤과 비슷하다. 그래서 ‘개밤’으로 불리다가 ‘개암’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개암은 가난했던 시절 구황식량 구실을 했고, 밤 대신 제사상에도 오르는 등 우리에게 친숙한 견과류다. 한방에서는 개암 열매 말린 것을 진자(榛子)라고 해서 약재로 쓰고 있다. 강원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개암보다는 ‘깨금’이 더 익숙하다. 개암의 강원·전북·충청 지방의 사투리가 바로 ‘깨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대 초반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를 읽으면서도 개암 냄새가 깨금 냄새인 줄 몰랐다.

커피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어로 ‘빠르다’는 뜻이다. 전용 기계를 이용해 고온에서 빠르게 뽑아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면 아메리카노가 되는데,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배급받은 커피를 최대한 많이 마시기 위해 물을 탄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 이탈리아에 진출한 미군 병사들이 진한 에스프레소가 부담스러워 끓는 물을 섞어 연하게 마신 것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카푸치노는 이탈리아 프란체스코회 카푸친 수도사들이 쓰던 흰 모자가 커피 위에 올리는 우유 거품과 비슷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란다.

그러고 보니 개암 커피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다. 엄마 몰래 숟가락으로 떠먹었던 그것이 개암 커피였고, 친구들과 뒷산에서 뛰어 놀다가 개암 열매를 찾으면 이로 깨물어 고소한 속살을 먹으며 행복해했다. 출근길 혹은 나른한 오후 커피 전문점에 들러 개암 커피 한 잔으로 여유를 즐겨 보자. 만약 커피 전문점 직원이 개암 커피를 못 알아듣는다면 친절하게 설명해 주자. 헤이즐넛이 우리말 개암이라는 것을 알면 커피맛이 더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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