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사나이, 전투식량 시식기

입력 2015-11-1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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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어박스 막내 에디터L입니다. 혹시 저를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라면으로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외국 라면만 줄창 먹다가 이국적인 향신료에 카운터 펀치를 맞고 한동안은 고춧가루와 마늘 팍팍 넣은 한국음식만 먹고 살았답니다. 역시 음식은 한식이 최고예요.

오늘은 대한민국 건장한 남자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본 추억의 전투식량을 먹어볼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는데 전투식량 리뷰라니! 제 상황과 딱이었죠(일단 촬영부터가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그럼 시작해 볼까요? 지금부터 과년한 두 여자의 고군분투 전투식량 체험기를 시작합니다!

사실 전투식량은 관심도 없었다. 세상에 맛있는 게 이렇게 많은데 굳이 전투식량을 먹어야 할까? 하지만 <진짜 사나이>에서 아기병사 형식이가 그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니 그 맛이 궁금해졌다. 그래! 형식이가 맛있댔으니 내 입에도 맛있을 거야.

전투식량을 챙겨 룰루랄라 출발! SNS 인증을 위해 사진도 찍고 주변의 군필자들에게 나 오늘 전투식량 먹는다고 자랑하느라 신이 났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앞에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이럴 수가! 전투식량은 극한 상황에서 먹는 음식이 아닌가. 뜨거운 물처럼 사치스러운 재료가 들어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야외 훈련 분위기를 내며 시식하려고 무거운 테이블까지 들고 왔는데, 망.했.다. 함께 촬영 온 26개월 만기전역한 군필자는 다 알면서 우리에게 귀띔조차 해주지 않았다.

왠지 전투식량은 추위와 허기랑 싸우면서 먹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점심도 거르고 촬영을 나왔는데… 뜨거운 물이 없어 밥을 먹을 수 없다니! 갑자기 극심한 허기가 밀려온다. 마침 부식으로 챙겨온 참치 크래커가 보인다. 거칠게 포장을 잡아 뜯는다. 우린 숟가락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캔 뚜껑으로 참치를 퍼서 카나페를 만들어 먹으면 되니까.

평소엔 이렇게 경우 없이 먹는 여자들이 아니니 오해 마시길. 이건 다 극심한 공복감으로 인해 전투력이 하늘을 찌른 탓이다(나중에 포장 용기에서 일회용 숟가락이 발견된 건 비밀이다). 담백한 크래커와 고소한 참치가 만나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며 성난 위를 살살 달래준다. 흠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군.

진짜 군인이 된 기분을 느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야무지게 실패! 하지만 포기란 없다. 재빠르게 노선을 변경해 그나마 가까운 곳에 사는 군필자 K의 집에 가서 2차같은 1차 촬영을 하기로 한다.

화끈한 여자1은 참맛에서 만든 불닭비빔밥을, 식탐이 화끈한 여자2는 욕심을 내어 불로 전투식량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잡채비빔밥과 고추장 쇠고기 비빔밥 이렇게 두 가지, 놓치지 않을 거예요.

역시 집이 최고다. 물만 붓고 스위치만 켜면 이렇게 쉽게 뜨거운 물을 구할 수 있는데 괜히 밖에서 개고생했다. 첫 타자는 참맛에서 나온 즉각취식형 불닭비빔밥이다. 봉지 안에는 지우개처럼 생긴 수상한 흰 건더기가 가득하다. 그 안에 숨겨진 밥알은 밥통에서 일주일 정도는 방치되어 말라 비틀어진 것 같은 모양이다. 이외에도 고소한 풍미를 더해줄 참기름과 화끈한 불닭소스가 들어있다.

잡채비빔밥이라니! 우리 엄마도 귀찮다고 안 해주시는 메뉴인데. 이걸 군대에서 먹을 수 있다고? 군인 오빠들은 참 좋겠다. 이렇게 썼다간 모든 군필자에게 너도 한번 군대 가서 먹어보라고 욕을 듣겠지? 봉투 안에는 참기름과 분말스프, 그리고 된장국이 들어있다. 국 없이 못 사는 한국 남자들을 위해 국물까지 챙겨주는 따듯한 정이 느껴진다.

‘차가운 도시의 여자’라면 다들 손목에 애플워치 하나쯤은 있어줘야 하는 거다. 두 여자 모두 시리를 불러 타이머를 켠다. 뜨거운 물을 부은 후, 10분을 기다려야 전투식량을 먹을 수 있다.

피보다 붉은 밥알, 수줍게 끼어 있는 김 가루, 보일 듯 말 듯 새하얀 속살을 보이는 너.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 비주얼이다. 입에 침이 고인다. 아무리 전투식량이라고 해도 세상의 트렌드를 놓칠 수 없는 법. 불닭비빔밥이라니 참으로 바람직하다.

한 입 먹는 순간 ‘퐈이아!’ 입에서 불을 내뿜을 정도로 맵다. 생각보다 자극적이고 근본 있는 맛이다. 첫맛은 달고 맵고, 조금 지나면 그냥 막 맵다. 군인에게 이렇게 매운 걸 먹여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다. 아니지 오히려 이런 자극이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될 수도. 그래도 색에 비해 많이 짜진 않다. 만족스러운 맛에 폭풍식사.

다음은 잡채비빔밥이다. 그런데 느낌이 좋지 않다. 라면도 아니고 국물도 없는 잡채비빔밥에 분말 스프가 들어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밥에 라면 스프를 비벼 먹는 것 같은 찝찝함이 엄습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군인은 까라면 까야 하는 법이다. 시키는 대로 가루로 된 잡채스프를 밥에 붓는다. 슈슉!

묵직한 고추장 소스를 넣는다. 후후. 새빨간 고추장을 흘려봐야 소용없어. 마음껏 발버둥 쳐봐. 어차피 난 너를 끝까지 쥐어짜고 괴롭힐 거니까.

잡채비빔밥과 고추장 쇠고기 비빔밥에 모두 들어있는 써비스! 된장국이다. 비주얼은 꼭 면만 건져 먹고 남은 라면 국물같이 생겼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맛이다. 묘사하자면, 고등학교 급식으로 나온 된장 국물에 나만의 맛을 더하겠다고 신 김치 몇 조각을 올리고 그래도 아직 부족해서 고추장까지 섞은 하이브리드한 맛이랄까.

잘 비벼졌으니 이제 먹어볼까? 가루스프를 넣었던 잡채비빔밥부터 먹어보자. 오물오물 씹다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담백한 맛이다. 거친 훈련으로 입안이 까끌하고 입맛이 없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씹어 넘길 수 있는 그런 맛이 난다. 질이 좋은 당면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면이 씹히는 맛이 잡채밥 비슷한 식감을 연출한다. 물론 맛은 사제 잡채밥과 많이 다르지만.

문제는 마지막으로 먹어본 고추장 쇠고기 비빔밥이다. 함께 시식에 참여한 군필자는 이십여 년 전에 먹던 고추장 비빔밥에서 전혀 발전하지 않은 맛이라고 평했다. 푸석한 밥알을 감싼 고추장 소스에서 10년은 묵힌 듯한 군내가 난다. 달지도, 짜지도, 시지도, 쓰지도 않은 밍밍한 맛에 오직 쿰쿰한 군내만이 느껴진다. 이건 도저히 맛없어서 못 먹겠다.

치열한 식사였다. 이제 오늘 먹은 전투식량의 순위를 매겨보자. 1등은 불닭비빔밥, 그리고 꼴등은 고추장 쇠고기 비빔밥이다. 특히 고추장 쇠고기 비빔밥은 포크도 거부하고 싶었는지 먹다 부러져버렸다. 제일 맛있는 불닭비빔밥은 결국 바닥까지 긁어먹고 시식 인원 모두 극한의 매움을 호소하며 찬물을 한 바가지 마셨다. 순위를 증명이라도 하듯 딱 이 순서대로 바닥을 보였다.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는 고추장 쇠고기 비빔밥을 당장 없애고, 불닭비빔밥을 적극 도입하는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특히나 불닭비빔밥은 등산 가는 아버지 배낭에 챙겨드리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맛이다.

자,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나의 첫 전투식량 시식기가 끝났다. 이번의 가슴 아픈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뜨거운 물이 필요 없는 발열 도시락을 이미 주문해둔 상태다. 그럼 다음번엔 좀 더 성공적인 리뷰로 다시 돌아오겠다. 이 땅의 모든 군인 여러분의 안녕과 맛있는 식사를 기원하며,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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