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지평선은 말이 없다’던 작대기 하나짜리 2병이었던 나는 정문과 무기고 강당을 돌아가며 보초를 서고 현역들 밥 해먹이고 빨래해주고 밤중에 라면 끓여다 올리고 소대장님 병장님들 기분 맞춰주는 ‘조국 방위’에 신명을 다 바치고 있었다. 2병이라고 같은 2병이더냐, 몇 달 전에 입대한 방위 2병이 어제 갓 들어온 현역 2병을 상전같이 모셔야 했다.
무기고는 현역과 방위병이 2인1조로 보초를 서게 돼 있었으나 저들은 어느 새 방위병에게 떠맡기고 아예 나오지 않거나 무기고 계단에 침낭을 펴고 잠을 자곤 했으니 그곳 군기를 알 만할 것이다.
신문사에 다니면서 방위근무를 하느라 ‘일하며 싸우던’ 나는 현역 방위를 통틀어 나이가 가장 많은 축인 데다 일부 현역들이 ‘언논인’이라고 불러주는 신분 덕분에 나름대로 덜 ‘고롭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늘 시끄럽던 ‘1번 또라이’ 현역 상병이 내가 다니던 신문사에 ‘주간여성’이라는 잡지가 있다는 것, 그 잡지에 펜팔난이 있다는 걸 어찌 알고는 자기를 내달라고 했다. 내무생활이 편하려면 안 들어줄 수 없겠는 고로 유행하던 양식에 맞춰 사연을 대신 써서 실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진실남이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찾는다’ 어쩌구 그렇게 써주었던 것 같다.
신문에 구혼 구직 광고가 실릴 때였다. 예를 들면 여자가 낸 구혼광고에 이런 게 있었다. ‘현숙. 39. 美智財 있는 고독녀. 有職眞男願.’ 이 광고는 ‘현숙하고 미모와 교양과 재산을 갖춘 39세의 고독녀가 직업이 있고 진실한 남자를 원한다’는 뜻이다.
좌우지우지좌지우지간에 그는 200통인가 300통인가 전국에서 ‘살도’(殺到)한 여자들의 편지를 받고 입이 귀밑에 올라가 걸렸다. 그중에서 ‘참가번호’ 123번쯤(알게 뭐야?) 되는 여자가 가장 좋았는지 나에게 멋진 답장을 써달라고 했다. 아니지. 몇 명 더 있었지. 그리하야 하루아침에 ‘펜팔스타’가 된 그 상병은 하루아침에 나의 후원자가 되어 다른 현역병들로부터 나를 보호/두둔/대변/엄호하기에 이르렀고, 덕분에 나는 좀 더 편해질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제대’(군인정신이 충일한 젊은이들은 악착같이 ‘전역’이라고 한다)를 하고 나오는 바람에 그 또라이의 뒷일은 알 수 없었지만, 대체로 철들면 바로 노망이 날 사람이었다.
이렇게 38년 전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며칠 전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 여러분께서 국회가 진정 민생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나서 달라”며 “국민을 위해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느 모로나 애국소녀, 고독녀로 보이는 박 대통령이 애타게 진실남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오죽 답답하고 화가 나면 그런 말을 했으랴만 김만복과 같은 사람도 진실남을 자처하는 세상이니 우습지 않은가? 충청도 발음으로 만뵉이 또는 맨뵉이는 진실로 자신이 진실남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착각이 단독 드리블하는 이런 사람들 말고 진실로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진실남 진실녀가 국회에 가득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