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상 칼럼]물가의 저주

입력 2015-11-13 10:48 수정 2016-01-2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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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상 서울대 겸임교수, 전 고려대 총장

지난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작년 동기 대비 0.9%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 0.8%를 기록한 이후 11개월째 0%대다. 이러한 장기 저물가 기조는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높여 편익을 증가하기보다는 생산과 투자를 위축시켜 경제를 불황의 함정에 빠뜨리는 저주로 작용해 문제가 크다. 경제가 정상적인 성장을 할 경우 일반적으로 저물가 현상은 산업생산성이 증가할 때 나타난다. 즉 기업들이 기술개발이나 비용절감 등으로 상품을 낮은 비용으로 생산하면 소비자가격은 자연히 낮아진다. 이 경우 생산성 증가는 소비 증가를 가져오고 소비 증가는 다시 투자 증가를 가져와 경제성장률이 높아지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선순환을 형성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 경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저물가 현상은 생산성 증가와 거리가 멀다. 가계부채와 고용불안의 2중고가 소비를 가로막아 아예 수요가 소멸해 물가가 낮아지는 극한적인 현상의 성격을 띤다. 현재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가구당 평균 6000만원이 넘는다. 이 정도의 빚을 안고 소비를 늘리기는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근로자들은 고용이 불안해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른다. 청년들은 거의 절반이 아예 취업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특히 청년 중에는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로부터 연간 이자율 30%가 넘는 고금리 대출을 받는 이들이 많다. 소비는커녕 파산으로 내몰리는 형국이다. 소비 수요의 실종은 투자를 위축시키는 것은 물론 빚으로 연명하는 좀비기업을 양산해 경제를 부실하게 만들고 있다. 경제의 부실화는 일자리 창출 중단 현상을 가져와 다시 고용불안과 가계부채 증가를 확대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결국 저물가 현상이 경제의 숨통을 막아 공황상태로 만드는 디플레이션의 재앙을 낳고 있다.

물가의 저주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식물가는 저물가이나 의식주 물가는 고공행진이라 서민들의 고통이 크다. 최근 통계청은 공식물가 지표와 체감물가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지적에 따라 의식주 물가를 따로 산출했다. 공식물가 지표에는 사람에 따라 소비를 하지 않거나 소비 빈도가 낮은 품목들이 포함되어 있어 체감물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결함이 있다. 따라서 통계청은 의류 및 신발, 식료품 및 음료, 전월세 등 의식주 관련 품목들을 선별해 물가상승률을 따로 조사했다. 올해 들어 지난 9월까지 481개 소비품목의 평균 공식물가 상승률은 0.6%다. 이에 반해 의식주 관련 74개 소비품목의 평균 물가상승률은 2.2%나 된다. 이는 전반적인 저물가 기조 때문에 경제는 불황의 늪에 빠지고 있는데 생활비 부담이 빠른 속도로 증가해 소비자들이 2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우리 경제는 소득 격차가 크고 청년실업률이 높아 서민과 청년들에게 고통이 집중되는 구조여서 심각한 사회불안과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물가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길은 없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어렵다. 우리 경제의 절박한 과제는 성장동력을 되찾는 것이다. 최근 우리 경제는 내수시장이 무너진 것은 물론 버팀목인 수출산업까지 위축돼 식물상태로 치닫고 있다. 지난달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15.8%나 감소했다. 이런 견지에서 조선,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 등 주력산업들을 대체하는 신시장, 신사업을 발굴하고 내수산업과 서비스산업 발전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실기업들의 과감한 정리와 기업의 핵심 역량 강화는 필수적이다. 여기서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중소기업 중심으로 바꾸어 경제의 고용창출 능력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이와 더불어 기업에 편중돼 있는 소득을 투자자나 근로자에게 배분해 소비여력을 높이는 정책을 펴야 한다. 더욱이 기업 간, 계층 간 양극화가 심한 상황을 감안해 법인세와 소득세의 최고세율을 높여 조세의 소득 재분배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가계부채 문제도 방치하면 안 된다. 금리 인하나 만기 연장 등으로 상환 부담을 줄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제2금융권의 고리대금 때문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서민들을 구제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에 따라 경제 전반적으로 소비가 늘어 경제가 디플레이션의 함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약을 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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