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올해 눈도 동화처럼 펑펑 내려라

입력 2015-11-2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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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엊그제 설악산에 제대로 된 첫눈이 내렸다. 기록상의 첫눈은 이미 지난 10월 중간에 내렸지만, 쌓이지는 않고 그냥 공중에서만 보이고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그야말로 아쉬운 첫눈이었다. 그런데 엊그제 내린 눈은 20cm가 넘는 적설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나는 대관령 아래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눈에 대해서는 아주 각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내 기억 속의 첫눈들의 모습은 대개 이렇다. 아직 산에 있는 나무들에 단풍이 매달려 있고, 어떤 때는 푸른 잎사귀가 그대로인 나무도 많은데, 어느 날 갑자기 내린 눈으로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참 이상한 것이 곧 눈이 오고 겨울이 오는 걸 나무들도 알 텐데 어떤 나무들은 그걸 알면서도 늦가을에 햇빛이 조금만 비쳐도 새싹을 내밀려고 애쓰고, 풀도 제철이 아닌데도 꽃을 피우려고 애쓴다. 그 위에 야속하게 첫눈이 내리고, 그 첫눈 위에 무시무시한 대관령의 폭설이 겨우내 내리고 쌓인다.

눈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을 읽었다. 그때 읽은 책으로 지금도 내가 기억하는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은 이렇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그리고는 그 ‘국경’이라는 말 옆에 괄호를 열고 사실은 국경이 아니라 현과 현 사이의 접경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도와 도의 경계쯤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중에 그 책을 읽은 사람마다 그 첫 문장이 무척 놀라웠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그것을 읽으면서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두 문장을 ‘마치 우리 동네 같은 마을인가 보군’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이 놀라운 문장 역시 소설 문장으로보다는 어린 날부터 늘 봐온 눈 내린 날의 밤풍경으로 그것을 이해했다.

더구나 대관령의 아흔아홉 굽이 대신 산허리를 뚫은 터널이 생기고부터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고 하는 이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을 때가 많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어 날씨가 따뜻한 강릉보다는 대관령 꼭대기 윗동네인 평창이 눈도 일찍 내리고 겨울도 빠르다. 어느 흐린 날 강릉에 왔다가 저녁 늦게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자동차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 강릉은 눈이 내리지 않았는데, 몇 개의 터널을 빠져나가 만나는 대관령 서쪽 너머 동네는 그야말로 밤의 밑바닥이 하얘져 있을 때가 있다.

스무 살 가까이 되었을 때 본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도 지금은 전체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랑하는 두 사람이 눈 위에 뒤로 벌렁 누워 눈사진을 찍던 모습만은 마치 어제 본 영화처럼 떠오른다. 어릴 때 우리들이야말로 그런 눈사진을 참으로 많이 찍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혼자 그러기도 하고 또 형제들과 손을 잡고 함께 눈 위에 뒤로 벌렁 눕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게 누구의 눈 사진인지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했다. 이렇게 겨울 고향에 대한 제 추억은 언제나 그렇게 눈과 함께 한다.

지금도 내 고향마을은 겨울마다 많은 눈이 내린다. 이번 겨울에도 틀림없이 많은 눈이 내릴 것이다. 나는 지금도 고향에 가면, 아니 고향을 생각하기만 해도 늘 넉넉한 마음부터 먼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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