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의 독서산책] 하윤선, ‘그림과 문장들’

입력 2015-11-2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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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험하게 보는 데 익숙하지만 책을 마음껏 찢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부분을 찢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어떻게 하겠는가. 하윤선의 ‘그림과 문장들’(루비박스)이 바로 그런 책이다. 원한다면 마음에 두는 부분을 찢어서 원하는 곳에 붙여 두고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책이다.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지만 발상의 전환이 신선하다.

10여 년간 피처 에디터로 활동해 온 작가가 내놓은 책은 그림 앞에서 떠오르는 명문들과 그림을 조합한 것이다. 오른쪽 면에는 명작들이 실리고 왼쪽 여백에는 명작들과 인연이 있을 법한 멋진 문장들이 들어서 있다. 왼쪽 하단에는 간단한 그림 설명이 있긴 하지만 작가의 주관적 평가는 최소한에 그친다. 모두 100점의 그림과 100가지의 문장으로 가득 채운 책이다.

책을 손에 쥔 채 아무 곳이나 펼치면 그곳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책이다. 아무런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고 이런저런 궁리를 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냥 편안하게 그림을 보면서 휴식을 취하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짧은 문장을 읽기만 하면 된다. 넉넉한 여백이 독자들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도록 도와줄 것이다. 에드워드 펜필드의 ‘1894년 하퍼스 크리스마스 호’이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아름다운 소녀의 시선이 아름답다. 곁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에 나오는 멋진 문장이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내부에 위치한 장소들의 문을 열어주는 존재로 남아 있는 한 독서는 우리의 삶에 유익하다. 반대로 독서가 정신의 개인적 삶에 눈을 뜨게 하는 대신에 그것을 대체하려 할 때 위험해진다.”

존 화이트 알렉산더의 ‘제럴딘 러셀’은 1902년 작품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발레 공연을 위해 준비 중인 소녀들로 가득찬 실내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은 우리에게 이제 막 시작될 발레 공연의 설렘을 전한다. 그러나 그림의 왼쪽에 시선을 두면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 등장하는 한 문장이 소개되어 있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는 꿈꾼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누구든지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작가에 대해 후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서른이 지난 후부터는 좋은 의미에서 충격으로 다가오는 작가를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제임스 설터는 좋은 의미에서 충격을 주는 작가다.”

어두컴컴한 배경을 뒤로하고 검정색 옷을 입은 소녀는 뒷모습을 보인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배경만큼이나 뭔가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모습이다. 로버트 리드의 ‘여름날의 소녀’라는 작품이다. 저자는 그림에서 얻은 감정을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세상에서 젊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단연코 없다오.” 그러나 젊음을 통과할 때 그것이 얼마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어느 누가 알겠는가. 사람들은 젊음이 기울고 난 석양의 해변에서 비로소 “아, 그 시절이 정말 찬란한 시절이었구나”라는 한탄을 하기 쉽다. 작가는 이런 깨달음을 글로 전한다. “아름다움의 절정은 젊음이다. 시간이 곧 아름다움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걸 알았던 것 같다. 그 어떤 막대한 부로도 살 수 없는 젊음의 가치를 말이다.”

넉넉한 시간을 갖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은 찢어서 붙여 두고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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