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이 많은 만큼 겁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히스로 공항에 한밤중에 떨어지는 것쯤이야 문제될 게 없다고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여권에 도장을 받고 출구로 나가자마자 나의 내면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기다리던 사람은 딱 봐도 생소한 아랍계 남자였다.
겁이 덜컥 났다. 그는 웃으며 내 짐을 받아 택시에 실었다. 자신은 파키스탄 출신의 택시기사라고 소개했다. 매우 적극적으로 친절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홈스테이를 할 집까지 가는 동안 나는 어깨가 뭉칠 만큼 긴장했다. 아랍계 억양의 영어와 ‘콩글리시’는 대화를 계속할 수 있을 만큼은 어울렸지만 낯선 도시에 깜깜한 밤, 게다가 더 낯선 아랍계 젊은 남성에게 길 안내를 오롯이 맡기는 것은 겁이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북이냐, 남이냐 묻는 그에게 남한에서 왔다고 답하고선 “왜 영국에 와서 일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일자리가 있어서”라고만 얘기했던 걸로 기억한다.
영국에 유색인종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선 학교는 일본 학생들로 가득했다.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지만 버블경제가 한창이던 때였으니 당연했다. 파키스탄 등 아랍계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3D 직종부터 서비스업까지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처럼.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고 배웠으나 영국인들은 외국인들에게 예상보다 훨씬 쌀쌀맞았다. 일본 친구들과 어울려 저녁길을 걷다가 ‘블러디(bloody)’란 영국식 욕을 뒤통수에 비수처럼 맞은 적이 꽤 많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영국은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영국병을 없애겠다는 대처리즘으로 인해 수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됐고 그래서 제노포비아(xenophobia·외국인 혐오증)가 강했던 때였다. 사지드 자비드(Sajid Javid) 산업부 장관은 파키스탄에서 영국으로 넘어와 밤낮없이 일해 생계를 꾸려 ‘미스터 밤낮(Mr. Night and day)’이라 불린 아버지 밑에서 자라 성공했지만 매우 드문 경우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프랑스에 들렀다. 놀랍게도 이곳 역시 이주노동자들이 많았다.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 ‘가르송(garcon·젊은이, 소년)’ 중 많은 수가 모로코 등에서 온 흑인이었다. 자유·평등·박애(fraternite)로, 또한 톨레랑스(tolerance·관용)로 알려진 프랑스이니만큼 이주민에 대한 포용력이 높은가 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 대개는 에펠탑과 개선문으로 알려진 파리 중심가가 아닌 방리유(banlieues·외곽지역)에 살고 질좋은 일자리를 갖지 못하면 빈곤의 대물림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걸 지난 2005년 방리유 이주민 가정 청소년들이 주도한 소요 사태를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못지않은 프랑스의 이주민 분리정책이 심각하다는 것도.
최근 파리 테러 이후 뉴욕타임스(NYT)에 칼럼을 기고한 한 미국인 역시 이러한 분리, 차별 정책이 여전함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극단주의적 테러를 불렀다고 지적한 것을 봤다. 이 미국인은 25세의 아흐메드란 이름을 가진, 깔끔한 외모의 아랍계 운전기사가 운전한 택시를 탔는데 짧은 길을 가는 동안 무려 세 번이나 경찰의 검문을 당했고 그때마다 경찰에게 자신을 설명하고 수분이 걸리는 심문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도 이주민들이 150만명이 넘는 시대가 됐고 그들에 대한 산업 의존도가 높아졌지만 선민의식과 차별은 여전하다. 이들이 우리와 함께 자신들을 ‘우리’라고 칭할 수 있고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포용 정책과 문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가슴 아프지만 파리 테러를 통해서라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특히 ‘헬조선’이란 말이 떠돌 만큼 우리끼리의 양극화도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