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화법은 여야 간 이견 조율이 안 되면 재적 의원의 5분의 3 동의가 있어야만 법안 등을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한쪽 정당이 60% 이상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는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국익과 직결된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비롯해 각종 경제 민생 법안들의 처리가 소수당에 의해 수년 동안 가로막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선진화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개헌’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반 찬성으로 의결해왔다.
대부분 선진국에서도 과반 찬성을 통해 법안을 처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특히 미국이나 영국에는 중대성이 인정되는 안건을 ‘신속입법’(패스트 트랙)으로 지정해 지연 처리를 방지하는 장치가 마련돼 있다.
국가별 정치제도와 환경이 다르지만, 향후 선진화법 개정 과정에서 이런 선진 의회의 제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미국, 신속입법 절차 제도화된 대표적 국가 = 전진영 국회 입법조사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 의회는 신속입법 절차를 통해 주요 법안들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국익과 직결된 무역협정 관련 법안을 예로 들 수 있다. 미 행정부가 의회 동의를 얻기 위해 무역법안을 제출하면 의회는 제출된 법안을 수정할 수 없다. 단, 법안 제출 전 행정부와 의회가 협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각 위원회는 이 법안을 45일 이내에 검토해 상하원의 본회의에 회부해야 한다. 만약 위원회가 회부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본회의에 올라간다. 본회의에서 토론은 20시간으로 제한되며, 15일 이내에 수정 없이 찬반 의사만을 묻는 가부 투표가 실시된다.
행정부는 타결한 무역협상 결과가 의회 입법과정을 거치면서 수정될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협상을 쉽게 끌어갈 수 있다. 우리나라가 각국과 FTA에 서명한 이후 비준동의 과정에서 여러 제약을 받는 것과 확연히 비교되는 제도다.
또 다른 신속 입법 처리 제도로는 미 하원이 회기 중 위원회가 법안을 30일 이상 계류시키고 있을 때 의원이 소관 위원회의 법안심사권을 박탈하고 본회의에 상정할 수 있는 위원회심사배제 요청이 있다.
위원회심사배제 동의가 안건으로 상정되기 위해서는 하원 의원의 과반(218명)이 서명하면 된다. 이후 위원회심사배제 의안목록에 등재되고, 등재된 지 7일이 지난 동의안은 회기 말의 6일을 제외하고는 매월 둘째, 넷째 월요일에 우선적으로 처리된다.
위원회 심사를 배제하는 다른 방법으로 규칙위원회의 본회의 강제부의권이 있다. 규칙위원회는 소관 위원회가 하원 본회의 보고를 원치 않는 법안에 대해 본회의에 강제 부의할 수 있는 특별규칙을 부여할 수 있다. 다만 위원회의 고유권한을 박탈한다는 점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또한 미 하원은 세출위, 예산위, 하원감독위, 규칙위, 윤리위 등 5개 위원회는 특정의안에 대해 위원회 심사를 생략하고 곧바로 본회의에 상정할 수 ‘특권적 입법’ 권한을 갖고 있다. 특권적 입법의 대상 의안은 △일반세출승인법안(9월 15일 이후 보고될 경우 준예산결의안) △예산결의안 및 조정법안 △발간결의안과 하원예비비의 지출 △의안처리 규칙 및 순서 △하원의원이나 직원의 행동에 대한 권고결의안 등이다.
미 의회가 기본적으로 합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이런 신속 입법 제도들이 자주 활용되지는 않지만, 이런 제도의 존재 자체가 법안의 지연 처리를 방지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영국 상원의 ‘정부제출안 우선권’ 제도 = 의원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영국에서는 다수당의 지도자가 총리가 되는 것 외에도 다수당의 권한이 막강하다. 그야말로 철저한 다수결의 원칙을 적용하는 국가인 셈이다.
이로 인해 정부가 제출한 법안의 가결률은 90%에 육박한다. 반면 의원안의 통과율은 6%대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단순히 다수당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하원의사규칙 제14조 제1항은 “정부제출 안건은 모든 회의에서 우선권을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상원에서는 신속입법을 완전히 제도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의를 진행 중이다. 헌법위원회는 신속입법을 “정부가 신속한 입법이 필요하다고 보고, 정부의 입법주도권과 의사일정 통제권을 이용해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이런 논의 이전에도 경제위기 대응, 국제협정 등 중대하고 시급한 안건들을 미국과 비슷한 방식의 신속입법으로 처리해왔다.
실제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때 경제위기 대응 목적으로 만든 ‘Banking(Special Provisions) Bill’은 위원회 심사와 본회의 보고 시간 등을 합쳐 이틀 만에 처리했다.
또 같은 해 법원 판결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법정 증인을 익명으로 보호하는 ‘Evidence(Witness Anonymity) Bill’을 위원회 심사를 포함해 하루 만에 본회의에서 의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