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사회]그늘진 세상에 인권의 불 밝힌 ‘노동자·빈민의 대변인’

입력 2015-12-1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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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인권변호사’ 故조영래 25주기… 망원동 수재·상봉동 진폐증··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변호

‘용기가 없는 사법부, 스스로의 사명을 저버린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말하거니와 이 재정신청 기각결정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사법부의 독립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고(故) 조영래(사법연수원 12기) 변호사가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경찰관들에 대한 무혐의 처분에 불복해 재정신청을 냈지만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남긴 글이다.

오는 12일 타계 25주기를 맞는 고인은 1세대 인권변호사로서 우리나라 변호사 공익활동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노동자의 권익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던 80년대 초 ‘전태일 평전’을 저술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했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맡아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목소리를 냈다. ‘상봉동 진폐증 사건’과 ‘망원동 수재(水災) 사건’에서 국가 배상을 받아내 변호사의 공익 활동 범위를 넓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김한규)는 조영래 변호사 타계 25주기를 맞이해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1층에서 기념전시회를 11일까지 열고 있다. 학생과 빈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앞장섰던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다.

◇행동하는 실천가… 수배 중 ‘전태일 평전’ 저술도 = 1947년 대구 출생인 그는 경기고 재학시절부터 파란만장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신념을 안에 가두지 않고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겼던 그는 고3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동한 이유로 정학처분을 당했고, 서울대 법대 재학 중에는 6·8부정선거 규탄, 3선 개헌 반대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벌였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사법연수생 신분으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1년 6월의 실형을 살았다. 출소 후에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여간 수배를 피하며 은둔생활을 했다. 사법연수원을 10년 터울 후배들과 함께 수료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조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출고한 것도 수배 중이었을 때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조명하며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정권의 노동탄압이 심각했던 상황에서 ‘조영래’라는 저자명은 표기되지 않았다. 이후 1991년 개정판이 나올 때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단체소송, 환경소송까지… 변호사 공익활동 지평 넓혀 = 조 변호사는 1980년 수배 해제 이후 복권, 2년 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활동 영역을 시국사건 변론에 한정하지 않았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제기한 다양한 사회 이슈들은 법조인들은 물론 사회운동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1984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 유수지 수문이 무너져 침수 피해를 입은 수재민 5800여 가구를 위해 무보수로 국가를 상대로 단체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망원동 수재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을 통해 조 변호사는 시민소송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권리의식을 일깨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1심 민사소송에서 승소한 뒤 조 변호사는 1987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잘못은 덮어두고 천재(天災)로만 돌리며 책임 회피를 일삼는 공권력의 타성에 제동을 걸고, 시민들의 침해된 권리를 구제하기 위해 소송을 맡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1988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은 서울 중랑구 연탄공장 인근 공장에서 나오는 석탄 분진으로 진폐증에 걸린 시민을 위해 강원산업을 상대로 소송을 냈던 사건이다. 조 변호사는 당시 일반인에게 생소하던 ‘환경권’을 토대로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으로 ‘인권 변호사’ 조영래 이름 알려 = 세상 사람들이 ‘조영래’라는 이름을 알기 시작한 것은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통해서다. 조 변호사는 피해자 권인숙씨의 법률 대리인을 자처하며 5공화국의 참담했던 인권 상황을 세상에 드러냈다.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성고문을 당한 한 여성의 인권은 검찰과 법원도 외면했지만, 조 변호사의 집념으로 결국 가해자인 부천서 경장 문귀동은 87년 6월 항쟁 이후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돼 징역 5년의 실형을 살았다.

이후 각종 시국사건 변호와 노동운동, 환경 소송을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던 조 변호사는 1988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창설에도 참여했다. 1990년 12월 12일 끝내 군사정권의 끝을 목도하지 못하고 폐암으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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